| 제목 | 11월3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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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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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1-03 | 조회수59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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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거저 주어진 선물
예수님은 앞서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겸손을 상기시키셨으며, 이제 식사에 초대한 사람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따라 모든 행위를 조정할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셈족들에게 있어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열고 우정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을 초대하는 사람은 이해타산적인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사 초대는 하느님이 이르신 사랑에 기초한 행위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또 다른 방법,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곧 제자는 모든 행위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 절대적인 이타적 행위로 열립니다. 식사에 초대받기는 했으나 그 보답으로 식사에 초대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무상의 사랑으로 자기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위대한 행위,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사랑의 숭고한 행위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과 심판의 날에 이는 참 행복과 영원한 보상의 발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신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실 사랑의 잔치를 마음에 두십니다. 이 잔치에는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사성제는 사회 계급이나 종족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막 태어난 교회가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에게 주신 이 가르침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와 바오로 서간을 읽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큰 선물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았으니, 이웃들, 그들이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저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늘 하루, 잠시만이라도 이기적이거나 이해타산적인 우리의 셈법을 내려놓고, 주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대로, 마음 외에는 감사할 방법이 없는 이웃들에게 다가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좀 더 의미 있고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오늘 루카 복음(루카 14,12-14)은 잔치의 초대와 관련된 주님의 가르침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적 체면과 보답을 기대하며 잔치에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질서를 전복하시며, 갚을 수 없는 이들, 곧 가난한 이, 불구자, 절름발이, 눈먼 이를 초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정의이다. 하느님 나라는 거래와 보상에 근거하지 않고, 무상의 은총과 자비에 근거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 복음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잔치를 열 때, 부유한 자를 부르지 말라. 그들은 너를 다시 불러 네가 한 것을 갚아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보상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불러라. 그들은 너에게 갚지 못하지만, 그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너를 갚아주실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50) 즉, 인간적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상을 바라보며 자선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은 단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곧, 가난한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De officiis ministrorum, II, 28(136-138절)이라는 해석이다. 성 바실리오는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너의 곡간에 넘쳐나는 것은 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네가 입지 않는 옷은 벌거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창고에 쌓인 곡식은 굶주린 이들의 것이다.”(Homiliae de divite et Lazaro) 나눔은 선택적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이 맡기신 재화를 올바로 관리하는 정의의 행위임을 분명히 한다. 교리서는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식해야 한다.”(2443항)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에서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살을 만지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음화다.”(Evangelii Gaudium, 197항) 한다. 주님의 말씀은 “주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광임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신앙인은 “갚을 수 없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덕행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방식을 닮는 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셨듯이, 우리도 조건 없이 나누고 사랑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거래의 논리에서 은총의 논리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나누며,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영적 보상을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참사랑과 거짓 사랑 쉬운 구별법 우리는 가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별하지 못해 상처를 입거나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어지려면, 참사랑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늙은 왕이 세 딸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딸에게 가장 큰 보상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딸 고너릴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생명과 명예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왕은 흡족해하며 왕국의 3분의 1을 줍니다. 둘째 딸 리건은 한술 더 떠, "아버지를 사랑하는 기쁨 외에 다른 모든 기쁨은 저의 감각에서 죽은 것과 같다"라고 맹세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또 3분의 1을 줍니다. 그들의 고백은 정확히 아버지 리어왕의 시선에 맞춘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왕국을 보상받았습니다. 이제 왕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딜리어의 차례입니다.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아라." 코딜리어가 마침내 입을 엽니다. "저는 폐하를 제 의무(my bond)에 따라 사랑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저는 언니들처럼 남편을 두면서 제 사랑 전부를 아버지께만 바친다고는 맹세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은 격노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데 눈이 멀어, '의무'로 사랑을 고백한 코딜리어를 추방합니다. "나의 행위는 반드시 내가 사는 세상의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CCTV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CCTV가 많아서 범죄율이 낮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시선'에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지배받는 시선이 나의 부모일 수도 있고, 이 세상 누군가의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욕망, 즉 에덴의 '뱀'처럼 '너 자신이 기준이 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CCTV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뱀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CCTV는 나에게 '의무'를 주는 나의 주인이고, 내가 사는 왕국의 왕입니다. 리어왕의 궁정은 이 '보상'이라는 세상의 CCTV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고너릴과 리건과는 다르게 코딜리어는 누구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CCTV는 '하늘의 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땅의 왕(리어왕)이 아닌 하늘의 왕을 섬겼고, 하늘에 정해주는 이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리어왕이 두 딸에게는 쫓겨나서 결국 막내에게 향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나이가 많이 먹도록 참사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CCTV를 정확히 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예수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할 때, 바로 그때 '너는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CCTV가 감지하지 못하는 행복입니다. '금도끼 은도끼'의 정직한 나무꾼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산신령이 내민 화려한 '보상(금도끼)'이라는 CCTV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진실(쇠도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은 그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모든 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 솔직한 이들은 하늘의 보상을 받습니다. 성 니콜라오 주교는 가난한 세 딸을 돈 때문에 팔아넘겨야만 하는 한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몰래 지참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떤 감사나 보답도, 즉 세상의 CCTV에 찍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산타 클로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코딜리어처럼, 하느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의무(bond)', 즉 하늘의 CCTV 앞에서 사랑하고 봉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CCTV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하늘을 위해 사는 사람, 하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참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람을 분별하고 싶거든 그 사람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면 됩니다. 세상의 CCTV는 우리를 기록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의 CCTV는 우리를 똑똑히 비추고,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가장 큰 영광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의 시선 때문에 움직이는지. 세상의 시선에 휘둘리는 자는 결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병우 신부님-"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14,13) '바보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14,12-14)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으면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초대할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14,13-14) 우리의 생각, 내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예수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음이 맞고, 뜻이 맞고, 자리가 맞고, 가진 것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이 참으로 벅찬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로부터,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7,34)라는 말도 들으셨습니다. 위령성월입니다. 먼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때가 되면 맞이하게 될 나의 죽음과 그 너머에서의 새로운 삶도 바라봅니다.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는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라, 죽음 저 너머입니다. 그곳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 영원한 기쁨, 영원한 평화,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궁극적인 희망과 목적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좀 색다르게 살아갑니다. 바보처럼 살아갑니다. 그 색다름과 바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보가 됩시다! (~ 2열왕1,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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