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1월 4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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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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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1-04 | 조회수29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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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15-24: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신다. 잔치의 음식은 단순한 세상의 먹거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사랑이다. 이 음식은 먹으면 잠시 배가 부른 세속적 음식과 달리,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의 은총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5절).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초대된 현실이다. 잔치를 준비하신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며, 사람들을 부르러 나가신 분은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7절).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해 마련하신 구원의 선물이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셨다. 이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거절한다(18절). 집주인이 준비한 잔치, 즉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사람의 일, 세속적 걱정과 편리함 때문에 무시당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한 모습과 같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초대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일상 속에 쌓인 걱정, 성공과 편안함, 사회적 기준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의 초대는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절하자, 초대는 다른 민족, 곧 모든 사람에게로 옮아간다. 이는 교회가 세상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타적이지 않고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는 사명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시지만,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다.”(참회록 IV, 10). 즉,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세상의 편견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과,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삶의 태도에 달려 있고 세속적 걱정이나 자기중심적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는, 세상과 사랑과 은총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삶이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깨어있기를 바란다
전삼용 신부님_그가 형제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이유 찬미 예수님! 서기 64년, 로마 제국의 심장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9일 동안 계속된 대화재로 도시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이재민이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을 때, 황제 네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팔라티노 언덕 위 자신의 궁전 발코니에서 리라(Lyra)를 켜고,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며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시적 영감을 만끽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수만 명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적 쾌락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왜 그는 형제들의 마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읽지 못했을까요? 네로는 이미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불릴 만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의붓형제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고, 여러 명의 아내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함의 정점에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준 '최고의 은인',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살해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을까요? 많은 학자는 그 원인을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서 찾습니다. 아버지는 네로가 3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네로의 세상은 온통 어머니였습니다. 아그리피나는 야망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삼촌이자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를 유혹해 결혼했고, 황제의 친아들을 밀어내고 네로를 황태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를 독살하고, 16살의 아들 네로를 로마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양심,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나에게 잘해주는 이(부모)에게 보답을 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신호를 배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도 마치 걸음마처럼 엄마의 칭찬으로 조금씩 발전시키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어린 네로가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려다 주거나, 작은 선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 했을 때, 아그리피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녀는 아들의 작은 '보답'에 진심으로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작은 정성보다는, 아들이 얼마나 더 영리하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지에만 몰두했습니다. 자기 외아들이 예술인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림 그릴 시간에 수사학 공부나 더 해라." "그런 사소한 일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마라." 아들은 지쳐갔을 것입니다. 나의 '최고 은인'인 어머니조차 나의 보답으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네로는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합니다.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 타인의 마음을 읽는 감정의 근육이 전혀 발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주고 황제로 만들어 준 어머니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타는 로마 속에서 절규하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마음 읽기'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잔치에 오십시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루카 14,16-18)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으니"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핑계들이 왜 그렇게 주인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이 단지 바빠서 못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연 주인의 마음은 무엇입니다. '기쁨'입니다. 자신의 풍요와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와서 먹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사에 초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와서 나의 기쁨에 참여해다오. 그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다"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인의 '기쁨'보다 나의 '밭', 나의 '소', 나의 '아내'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으며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분노합니다. "화가 난 그 집주인이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루카 14,21)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했기에, 그들은 네로와 같은 존재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음 읽는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만약 네로처럼, 혹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그 능력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김희아' 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의 절반 이상이 '불타는 듯한' 붉은 모반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를 고아원에 버렸습니다. 그녀는 평생 "왜 나만 이래야 해?" 라고 절규하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부모와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기도는 "하느님, 제발 이 점만 없애주세요"였습니다. 성인이 되어 점을 빼는 수술을 받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성당에 나아가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그런데 그 기도 중에 환시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김희아 씨 자신이 우는 것보다 '더 슬픈 눈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아, 저분은 나를 보며 나보다 더 아파하고 계셨구나. 나는 내 아픔만 생각했는데, 저분은 내내 나를 보며 울고 계셨구나.'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수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예수님, 이제 다시는 저를 위해 무엇을 청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 하며 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최고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은인(하느님)'의 마음을 읽자, '형제(이웃)'의 마음을 읽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이웃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왜 그토록 쉽게 관계에서 상처받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이 미사를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께 '보답'하는 하루를 살고 싶어집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마음(양심)에, 기쁜 하루를 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내 곁의 남편, 아내, 자녀, 그리고 상처받은 이웃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이웃과 잘 지낼 수 없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기쁘실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들과의 관계는 저절로 다 풀립니다. 그들의 마음도 읽을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11.4)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14,23) '부르심과 응답!' 오늘 복음(루카14,15-24)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14,15)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이 모두 양해를 구하며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루카14,18)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루카14,19)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루카14,20) 잔치를 준비한 사람은 많은 이들이 잔치에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14,23) 함께 묵상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준비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매일 성체성사(미사)라는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거룩한 초대에 우리는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잘 응답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미사)를 거행할 때에, 성당에 가득 찬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리고 성령의 활발한 움직임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기쁨이고 움직임이지요.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9-11) (~ 2열왕2,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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