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1월 05일 수원 교구청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05 조회수44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제자가 되는 길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당신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당신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군중에게 가르치고자 하십니다하느님의 나라가 운수대통으로 획득할 수 있는 복권과 같은 것이 아니라올림픽 대회에서 운동선수들이 메달을 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그러한 노력이 앞서야 함을 일러주십니다.

 

최선의 노력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그러하지 않고서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을 모든 것 위에심지어 모든 가족 관계 위에 모셔야 합니다가정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공동체사람에게 가장 편안함을 주는 공간입니다물론 예수님은 가정 공동체를 거슬러 행동하도록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다만 그 편안함이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데 장애물이 된다면그것을 뛰어넘거나 포기하는 용단이 필요함을 역설하실 뿐입니다나아가 목숨 부지에 대한 집착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예수님은 지금 온전한 포기를 종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받은 분으로 취급하고 말겠지만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을 포함한 사람들로부터의 저주와 저버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이르십니다따르기로 다짐했다면끝까지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따름은 따라서 끝까지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한 잠재력을 점검하기 위한 냉정한 절차를 필요로 합니다따름을 감행하기에 앞서예수님은 먼저 곰곰이 자신을 헤아려볼 것을 제안하십니다탑을 세우기에 앞서그리고 전쟁 마당에 뛰어들기에 앞서이것저것 고민해 보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가 여기에 숨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끝까지 따르는 데 필요한 모든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다만 따르려는 의지가 확고한지그리고 방법은 필요한 때에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인간관계와 세속의 재물이나 사정 등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제자가 되는 길은 요원할 것입니다우리는 많은 이가 우리와 함께 따라나섰다가여러 가지 사정을 이유로 도중에서 포기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보고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그렇다고 그분들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일 또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오히려 그분들이 회개로또는 필요하다면 마음을 풀고 주님의 따스한 품을 찾아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며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려는 우리의 의지 하나만으로 만족하시는 분입니다따르기 위해 필요한 지혜와 용기와 신념은 선물로 거저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그 크신 하느님을 이 비좁은 마음 안에 모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버려야 하고 비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스려 나가는 하루그럼으로써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면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직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하신다.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과 가족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님을 우리의 최우선으로 세울 때, 나머지 모든 관계와 책임이 그 안에서 참된 질서를 찾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네가 하느님보다 부모나 가족을 더 사랑한다면,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Confessiones I,1). 하느님 사랑이 우선될 때, 우리는 이웃을 진정으로,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라”(27절) 말씀하신다. 이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 뜻과 세속적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박해 시대에도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마음의 욕심, 자만, 자기중심적 선택을 내려놓는 일이다. 
 
예수님은 탑을 세우거나 전쟁을 준비하는 비유를 통해, 제자의 삶이 철저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31절). 한 돌로 탑을 세울 수 없듯, 한 계명만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매일의 기도, 선행, 계명 준수를 통해 믿음의 기초 위에 신앙을 쌓아가야 한다. 
 
1코린 3장 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쌓는 신앙의 집은 금, 은, 보석과 같은 가치를 지닌 계명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시편 119편 127절의 고백처럼,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라는 자세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책임과 기쁨을 지니고 있다. 제자의 길은 쉽지 않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영적 성숙과 참된 자유,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나는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매일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제자직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제자의 길은 철저한 준비와 끊임없는 실천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하느님과 참된 연합, 영원한 생명이라는 풍성한 결실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 길 위에서 흔들림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깨어있는 신앙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관계를 통해야만 완성되는 인간  

 
 
그리스 신화에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지하세계까지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능력으로 지옥까지 가서 죽은 에우티케아를 데리고 현실 세계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 직전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어기고 맙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의 진짜 이야기는 그 '상실' 이후에 시작됩니다.
지상으로 홀로 돌아온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던 그 순간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되새깁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 고통을 통해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우리디케 외에 다른 어떤 여자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대가로, '세상 모든 여인에 대한 자신'을 비워나가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길을 걷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여인들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광분한 여인들(마이나데스) 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으나, 그 여자를 잃은 고통을 통해 평생 다른 모든 것을 버려가며, 마침내 자신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이 완성된다"는 진리를 피로써 증명합니다.
설사 상실의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낡은 나를 '죽이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나로
정화시키는 용광로가 됩니다.  
 
이 이교도 신화가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자기 정화의 여정은, 놀랍게도 사도 바오로가 신앙 안에서 처절하게 고백했던 우리 안의 영적 싸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녕 저는 제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제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아, 저는 정녕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신에서 저를 구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 7,15. 24)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나', '죽음의 육신'이 바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게 만든 '불안'이며,
에덴동산의 '뱀', 즉 '나 자신(Ego)'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 안에 도사린 이 뱀, 이 끈질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은 어떻게 집행됩니까? 그것은 바로 '관계 맺음'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상대가 원하는 만큼 나를 죽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나의 시간, 나의 고집, 나의 자존심, 나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비움'의 실천입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죽어갑니다.
즉, 내가 용서하기 싫은 사람을 용서하는 그 순간이, 나의 '뱀'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공간이 넓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자기 비움'의 역설을 가장 강렬한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 말씀은 '자기 목숨'으로 상징되는 나의 가장 깊은 '자아'까지도,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 앞에서 기꺼이 비우고 내려놓으라는 촉구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를 비우지 않으면 상대를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 어떻겠습니까? 
 
관계란 마치 내가 버리는 무언가의 공간에 상대를 끼워 넣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 비로소 그분 전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되기를 원하지 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 비움'의 관계 맺음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구약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순수하고 착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형제들로부터 배신당하게 하십니다.
갖은 고난 끝에 마침내,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형제들, 아니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원수' 같은 형제들을 만나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축복'하는 장면이야말로, 한 인간이 '자기 비움'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관계의 정점에 도달하며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완성'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즉 '십자가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 자신을 죽여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오르페우스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내 안의 '뱀'을 보며 절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당신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기에, 저희 마음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나'를 비우고 '당신'을 채려는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비워진 자리에 하느님과 형제들을 채워 넣는 '사랑의 관계'를 실천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정화되고, 자유롭고, 참된 완성으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하나의 신비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비움과 채움!' 
 
오늘 복음(루카14,25-33)은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6)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부모와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가정에 충실해야 하지만, 가정 일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한 자기포기, 비움 그리고 무소유!'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키워드(핵심어)입니다. 
 
오늘 복음이 실행하기에 너무나 벅찬 말씀으로 다가오고, 짊어져야 할 큰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반전은 이 '십자가가 동시에 부활'이라는 신비이며,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신비입니다. 
 
내 것이 비워지면 비워지는 것만큼 하느님의 것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ㅎㅎ 
 
내 안에 있는 것, 곧 교만과 탐욕과 인색과 음욕과 분노와 시기(질투)와 게으름(나태)이 비워지면, 하느님의 것이 채워집니다. 하느님의 것, 곧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인 성령의 열매가 채워집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곧 부활이며, 비움이 곧 채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여정은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이며, 비움과 채움의 여정'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 
 

(~ 2열왕3,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