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슬로우 묵상] 광야에 두고 떠나는 사랑 -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작성자서하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05 조회수52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루카 15,4


광야에 두고 떠나는 사랑


나는 요즘 세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X세대인 나는 전후세대와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아래서 자랐고, MZ세대와 함께 일하며, α세대 조카들과도 함께 살아간다. 이렇게 다양한 세대와 부대끼며 살다 보니, 서로 다른 생각과 감수성 때문에 갈등이 생길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세대를 이해하고 싶었다. 자료를 찾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조금씩 오해가 풀리고,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다. 그들은 ‘공정’의 언어로 예수님을 비판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에 예수님은 이 놀라운 비유로 응답하신다. 지금 시대에도 공정과 자유, 그리고 효율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게 이 말씀은 도전적이고도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한 마리를 위해 아흔아홉을 두고 간다는 건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씀 안에서 좀 더 오래 머물러 본다.

정말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무책임하게 두신 걸까?

 

아니다. 그분은 방치한 것이 아니라 맡기셨다.

예수님에게 ‘광야’는 단지 위험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신앙의 학교였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현존이 머문 자리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양들을 ‘광야에 두었다’는 것은, 그들을 하느님 안에 맡겼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이 양들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믿으셨을 것이다.

광야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그곳에서도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신뢰의 공간이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손에 쥐려는 마음이 커지지만, 믿음이 깊어질수록 놓을 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아흔아홉을 하느님께 맡기셨기에 잃은 한 마리를 향해 나설 수 있었다. 그분의 사랑은 계산된 책임보다,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에서 비롯된 자유였다.

 

그래도 공정의 언어로 보면 이 이야기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 아흔아홉을 위험에 둔다는 건 불균형하고, 효율의 관점에서는 손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계산보다 관계를 택한다. 잃은 한 마리가 돌아와야 전체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회복이 모두의 회복이다. 예수님은 비유의 끝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잃었다가 되찾은 양을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한 마리의 회복이 온 공동체의 기쁨이 된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공동체다. 누군가 돌아올 때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 잃어졌을 때 함께 찾아 나서는 공동체.

 

요즘 세대는 ‘공정’이라는 단어에 민감하다. 불공정한 세상 속에서 자라며 공정이 곧 정의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한 걸음 더 깊은 차원의 정의를 제시한다. 모두가 똑같이 나누는 정의가 아니라, 잃은 존재가 다시 포함되는 정의.

하느님은 누구도 밖에 두지 않으시기에, 그분의 사랑은 늘 인간의 공정 너머에 있다.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공정의 세계를 거스르는 신뢰의 용기였다.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자유. 그 자유 안에서 사랑은 머무르지 않고 떠난다. 떠남 속에서 관계는 더 깊어지고, 광야 속에서 신뢰는 자라난다.

 

오늘 나는 이 말씀 앞에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사랑할 때,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사랑을 붙잡으려 하는가, 하느님께 맡기고 걸어갈 용기를 내는가?

 

공정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기보다, 광야에 두고도 평화로울 수 있는 믿음의 자리에 서고 싶다. 공정은 질서를 세우지만, 신뢰는 관계를 살린다. 하느님은 언제나 그 관계를 완성시키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흔아홉을 맡기고, 한 마리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 발걸음이 바로,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그 발걸음은,

결국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발자국이었다는 것을...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