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1월 6일 수원교구청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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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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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1-06 | 조회수32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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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군중 가운데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들로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유사한 유형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이들의 투덜거림에 응답하십니다.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말하는 데에 인용되는 고전적 주제이며, 흩어졌거나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음은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 은유입니다. 양을 잃어버렸을 경우, 목자는 양을 찾아 이리저리 뛰는 등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쏟았던 수고는 잊어버리고,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돌아와, 그 기쁨을 이웃들과 나눕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은전 한 닢을 잃었던 어떤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이 비유 말씀에서 예수님은 잃었던 양 또는 은전, 다시 말해서 죄인을 돌아오게 함에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밝혀주십니다. 잃었던 것을 되찾으시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염려와 애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죄인들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공동체에서 축출했던 바리사이들과 달리, 찾아 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되찾으신 것만으로 만족하십니다. 용서는 그다음 일입니다. 되찾으셨다는 기쁨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죄인들을 단죄하거나 축출하기에 앞서, 바리사이들이 마음에 꼭 담고 있어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이 기쁨을 모든 이와 나누어,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확인하고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당신을 보내신 성부께서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를 통해 큰 기쁨을 누리시니, 예수님도 그들을 돌보셔야 했으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드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거짓 의인들’은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회개로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의 원의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비가 선사하는 참 기쁨을 누릴 기회가, 곧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는 초대의 말씀에 응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 회개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돌아서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아니 돌아서도록 당신이 먼저 찾아 나서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 생각과 행동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바르게 생각하고 제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삶을 다지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5,1-10: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오늘 복음은 잘 알려진 두 가지 비유,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 두 비유는 공통으로 길 잃은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선다. 만약 인간적인 계산으로만 본다면, 한 마리를 포기하고 아흔아홉 마리를 지키는 것이 이성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계산적이지 않다. 사랑은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마음이다.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의 두 팔은 마치 우리를 어깨에 메고 계신 팔이며, 그 위에 우리의 죄가 얹혀 있다. 우리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쁨으로 맞아 주신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섰다. 그 양은 아담 안에서 길 잃은 인류였고, 어깨에 메어 오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lib. VII, 210–211). 은전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 새겨진 인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로 하느님을 떠날지라도, 그분은 우리 안에 새겨진 당신의 형상을 지워버리지 않으신다.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은전을 찾는 여인의 모습은 교회와도 같다. 교회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히고, 길 잃은 이들을 끝까지 찾는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올 때,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이 다시 빛을 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환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함께 울려 퍼지는 구원의 기쁨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올 때, 하늘이 기뻐하고, 교회가 기뻐하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늦게서야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당신을 찾았고, 당신 안에서 저의 안식을 얻었나이다”(Confessiones X, 27).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될 때, 우리는 하늘 천사들의 기쁨이 된다. 우리 각자가 회개와 사랑으로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오늘 복음은 죄인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목자의 마음, 하느님의 인내와 돌아온 한 사람 때문에 하늘이 환호하는 기쁨을 드러낸다. 우리가 모두 날마다 회개의 길을 걸으며, 천사들의 기쁨, 하느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전삼용 신부님_자녀는 부모가 집착하는 것을 집착한다. 찬미 예수님! 아이는 부모와의 감정 교류를 통해 성장합니다. 무엇을 할 때 부모가 기뻐하는지, 무엇을 할 때 마음 아파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만일 부모가 오직 '세속-육신-마귀'적인 것, 즉 돈, 성공, 쾌락에만 '집착'하고 영적인 가치에는 무관심하다면, 자녀 또한 '세속적 가치'에만 집착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존재, 즉 영적 소시오패스가 됩니다. 이것이 어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읽고, 똑같이 집착해야 할 하느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1887년, 14살의 소녀였던, 나중에 작은 꽃이라 불릴, 데레사 성녀는 신문 기사 하나를 읽고 충격에 빠집니다. '프란치니(Henri Pranzini)'라는 남자가 파리에서 한 여성과 그 자녀 둘을 끔찍하게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신문은 그가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무신론자로서 모든 회개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99%의 사람들은 그를 '심판'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14살의 데레사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께서 '집착'하시는 이 '잃어버린 1%'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이 살인자 프란치니를 '자신의 첫 번째 자녀'로 입양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그가 지옥에 가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리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데레사는 프란치니를 위해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극심한 고행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집착하시는 이 영혼이 돌아왔다는 '작은 표시'만이라도 보여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프란치니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완고했습니다. 그는 사제가 내미는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두대에 목을 내밀기 직전,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붙잡아', 그 상처에 '세 번' 입을 맞추었습니다. 며칠 뒤,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읽은 14살의 데레사는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집착'을 읽었고, 그분께 '잃어버린 1%'를 되찾아 드렸습니다. 이 14살 소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아버지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루카 15,2)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자녀는 부모가 집착하는 것을 집착합니다. 이것이 내가 누구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남들이 심판하는 한 범죄자도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손가락과 같은 자녀임을 알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열 명의 형들에게서 팔려 이집트로 갔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유일한 친혈육인 베냐민을 붙잡아 놓으려고 합니다. 이때 유다가 나섭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잃었는데, 베냐민까지 잃으면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이 감옥에 갇히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요셉은 유다와 형제들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같은 아버지를 가졌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다시 형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아버지께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LA의 그렉 보일 신부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착'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잃어버린 1%', 즉 갱단원들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99%의 사람들이 그들을 '심판'할 때, 보일 신부는 오늘 예수님처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수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머물 자격은 우리의 의로움(99%)에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형제(1%)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집착'을 내가 똑같이 '집착'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병우 신부님_"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루카14,7) '하느님의 기쁨인 회개!' 오늘 복음(루카15,1-10)은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기쁨인 회개'의 메시지와 '예수님께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15,1-7),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15,8-10),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는 모두 '회개의 기쁨'을 전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15,10)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15,32)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관심은 '모두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어보이는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어울리셨습니다. 죄인들이 돌아와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기쁨,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14,12)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나의 모습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참으로 가슴 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구나!"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이 결심을 실행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하느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2열왕5,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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