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송영진 신부님_ <신앙생활도, 사랑 실천도 장사가 아닙니다.> |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5-11-09 | 조회수2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교와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고,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라는 말씀은, “교회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만들지 마라.”, 또는 “신앙생활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생활이 아니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1,13).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성전은(교회는) 아버지를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이고,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는 곳이기 때문에 ‘기도의 집’입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기도 공동체’이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일치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현세적인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예나 지금이나 교회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자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성전 정화’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뒤에서 뇌물을 받아먹은 사제들, 그리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성직자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것, 그것은 그냥 ‘강도짓’일 뿐입니다. <‘강도짓’을 하고 있으니 ‘강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렇게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된 성전은 허물어야 하고, 강도짓을 하고 있는 교회는 개혁과 쇄신을 해야 합니다. 각 개인의 경우에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강도짓이나 하고 있는 교회는 없애라는 명령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라는 종교가 완전히 없어지기를 바라신 것은 아닌 것 같고, 하느님 뜻에 합당한 종교로 변화되기를 바라신 것 같은데, 만일에 유대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면, 그들은 완전히 참된 종교로 변화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리스도교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과 쇄신과 변화를 거부했고,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분리되었는데, 우리 쪽에서 보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유대교를 예수님께서 버리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4) 입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또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많이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많이 바쳐야만 은혜를 많이 내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그냥’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장사가 아닙니다. 신앙도 장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은 흥정과 거래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간청’할 뿐이고, 하느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아주 많이’ 주십니다(마태 7,11). 그 사랑과 자비에 감사드리면서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고, 사랑 실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