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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15일 수원 교구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15 조회수55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 기도의 유형은 청원기도를 말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기도에 대한 교육의 기회나 피정 등등의 시간에 강사님들이 종종 청원 기도보다는 감사 기도와 찬양 기도에 좀 더 집중하라고 일러주시는 경우가 많으나기도의 백미는 그래도 청원 기도입니다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한다는 것은청할 만큼 나는 부족한 존재이며하느님은 내 청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해서 내용은 청원이어도동시에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성경의 시편에 150개의 시가 실려 있는데그 가운데 60여 개가 청원 기도이고, 40여 개가 감사와 찬양 기도라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줍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항구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한두 번의 청을 올리고 나서과연 들어주실 것인지 아닌지를 지켜본다는 것은자칫 하느님을 시험해보는하느님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큰 잘못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니 꼭 들어주신다는 믿음으로 항구하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청했던 대로바랬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열심한 신자들은 아직도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탓하는가 하면많은 경우는 쉽게 포기해버리거나 불신을 표명하기도 합니다나아가 신앙생활까지 포기해버리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성이 부족해서이니내 뜻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죽어라 기도한다이 역시 또 다른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의식의 전환이 정말 필요합니다하느님을 내 뜻 안에 가두어놓는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인 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지만들어주시는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모범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이 내 뜻에 맞추어질 때까지가 아니라내 뜻이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질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며 힘써야 합니다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기도 자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는 주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자세입니다.

 

오늘 하루도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핵심인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먼저 내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기도인지 살피고나아가 내 뜻대로는 아니어도 하느님은 분명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다져나가는소중한 신념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루카 18,1-8: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픈 가족을 위해, 어려운 상황을 위해,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하늘은 침묵하는 듯 보인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낙심하기 쉽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전한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비유를 통해 항구한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신다.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인물이지만, 과부의 집요한 청원 앞에서 결국 정의를 내린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들의 권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 약속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시며, 단순히 청원이 응답되는 것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기도의 힘을 강조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기도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정화하여 참된 행복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II, 3, 11)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끊임없는 기도란 말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억하며 모든 일을 그분과 함께하는 것”(Homilia in 1 Thess. 5)이라고 한다. 교리서도 기도를 “하느님의 자녀와 아버지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교리서 2565항)라 정의한다. 즉, 기도가 단순히 청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길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 순간이 많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보다 훨씬 더 자비롭고 신실하시다. 개인적으로는, 기도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느껴질 때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드리는 기도일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사목 헌장 38항은 “인간은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가르친다. 교회는 곧 그 대화의 자리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길이다. 항구한 기도는 마지막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힘이 된다. 우리가 과부처럼 끈질기게 하느님께 매달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나은 때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안에서 믿음을 발견하실 수 있도록 끝까지 기도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 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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