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1월 23일 수원 교구 묵상글 |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12:29 | 조회수1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이병우 신부님_"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참왕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23,35ㄴ-43)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오늘은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온 누리의 임금(왕)이시라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세상이 말하는 임금(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참왕이신 예수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의 모습'입니다.
참왕이신 예수님은 군림하는 왕, 지배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너를 위해 십자나무에 달리신 왕, 모든 수난과 모욕과 빈정과 조롱을 다 받으시고 돌아가신 왕, 곧 '사랑의 왕, 겸손의 왕, 섬김의 왕이신 참왕'이셨습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에 와 있는 지금, 나는 얼마나 삶의 자리에서 이런 참왕이신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섬기며 살아왔는지, 이런 참왕의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했는지 말씀 안에서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다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일미사에 꼭 참석합시다! 그래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 은총(시간)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여 새로운 한 해(가해)를 기쁘게 맞이합시다!
다음 주일(11.30)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토요일(11.29)까지는 '성서 주간'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119,105)
우리의 등불이요 빛인 말씀 안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 합시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에 깨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전삼용 신부님_나의 기도는 시험하는 기도인가, 기억하는 기도인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은자』에는 아주 기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딴섬에 세 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글도 모르고 교리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손을 모으고 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당신도 셋, 우리도 셋,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느 날 그 섬을 방문한 주교가 이 기도를 듣고 혀를 찼습니다. "어허, 그렇게 기도해서는 하느님께 닿지 않습니다. 제가 정식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주교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노인들은 머리가 나빠 외우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주교는 뿌듯해하며 배를 타고 섬을 떠났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세 은자가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배전에 매달려 소리쳤습니다.
"주교님! 죄송합니다. 주교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거룩한 기도문을 그새 까먹었습니다. 처음 구절이 '하늘에 계신...'이었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디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주교는 물 위를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어르신들, 당신들의 기도는 이미 하늘에 닿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배울 뿐, 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하던 대로 기도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완벽한 기도문을 외우지만 왕의 능력을 모르는 주교와, 교리는 서툴러도 왕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물 위를 걷는 은자들. 과연 누가 하느님을 살아있는 왕으로 모시는 사람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지, 아니면 단순히 내 소원을 들어줄 해결사로 여기는지는 '기도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에 두 거지가 나옵니다. 왕이 행차할 때마다 한 거지는 "우리 왕 만세!"라고 외쳤고, 다른 거지는 "왕의 선물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왕은 자신을 사랑한 첫 번째 거지에게는 빵 속에 보석을 숨겨 보냈고, 선물만 바란 거지에게는 그냥 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거지는 빵이 무거워 팔아버렸고, 선물만 찬양하던 거지가 그 빵을 사서 횡재했습니다. 언뜻 보면 선물을 바란 자가 이긴 것 같지만, 결국 왕은 진실을 알고 첫 번째 거지를 궁으로 불러들여 식탁에 앉혔습니다. 선물만 바란 거지는 평생 구걸을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의 전략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인간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뜻이 사실은 '내 뜻'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느님이 계약을 위반한 것처럼 분노하게 만들어라."
이것은 명백한 '시험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당신이 진짜 왕이라면 내 병을 고쳐보십시오. 내 자식을 합격시켜 보십시오." 이것은 간청이 아니라 거래이며,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화법을 쓴 존재는 광야의 사탄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
사탄은 끊임없이 "If(만약 ~라면)"라는 조건을 달아 하느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런 태도를 엄중히 꾸짖습니다. "자매들이여, 왕이신 분께 고작 썩어 없어질 돈이나 명예를 달라고 조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지나 하는 짓이지, 왕의 자녀가 할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 그리고 성체이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험하는 기도'를 멈추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는 '기억하는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판관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양털이 젖게 해달라고, 다음엔 마르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이 나의 왕이심을 확신하고 싶습니다"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배우 최강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우울증과 중독의 늪에서 바닥을 쳤을 때, 그녀는 체면을 버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응답이 올 때까지,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결국 그녀에게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에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혼을 태우는 '불(Fire)'같은 체험이 찾아옵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 뛰어난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끝내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1654년 11월 23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던 그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양피지에 적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불(FEU)! 철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확신, 확신, 기쁨, 평화."
그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의 불을 '기억'하며 자신의 모든 지성을 왕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증명이 끝난 곳에서 확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 이와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전까지 제 기도는 온통 "이것 좀 주십시오, 저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라며 당신이 주님임을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체 조배 중에 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다 주었다. 생명도, 살도, 피도 다 주었다. 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느냐?"
그 순간 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미 생명까지 다 주신 분께, 고작 사탕발림 같은 위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의 압도적인 '다 주심'을 깨닫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청할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다 받았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제 기도는 오직 하나, '주님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다 주신 분의 뜻이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왕을 시험하는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지만, 왕을 인정하는 기도는 "이미 다 주셨음을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기도할 때, 다른 화려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수없이 반복하다가 날을 샜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신다는 그 사실 하나가 가슴 벅차게 차올라, 감히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쳤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기드온처럼, 최강희 씨처럼, 그리고 파스칼처럼 확신이 들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주님, 당신이 왕이심을 제 영혼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아, 그분은 나에게 다 주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날, 여러분은 더 이상 청원 목록을 들고 계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대관식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3,35-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1. 전례의 완성: 십자가에서 드러난 왕권 오늘은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곧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안에서 새롭게 하셨다(에페 1,10). 그분의 왕권은 세속의 권세나 무력의 지배가 아닌, 사랑과 자비, 그리고 십자가의 봉헌에서 나온 왕권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De Fide II,16,133)
2. 십자가 아래에서 드러난 왕의 모습 오늘 복음은 역설적이다. 왕의 모습이 아니라 패배자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러나 그 안에서 참된 왕권이 드러난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이 외친다. “이자가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루카 23,35-37) 그들의 조롱은 세속적 왕권의 논리에 기반한다. “왕이라면 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왕”이시다. 그분의 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능력, 그분의 통치는 자비로 다스리는 다스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왕으로서 다스리셨다. 그분의 못박힘은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다.”(Sermo 218,2)
3. 두 강도: 왕을 알아본 믿음의 눈 복음의 중심은 두 강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조롱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 위의 왕을 알아본다. 그는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고백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구원의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대답하신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이 ‘오늘’은 단순한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열린 하느님 구원의 오늘이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 회개한 죄인이 낙원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죄인을 구원하는 자비의 왕권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강도는 열쇠도, 공로도, 선행도 없었으나,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열었다. 주님은 그를 왕국의 첫 시민으로 맞이하셨다.”(Hom. in Lucam 23)
4. 그리스도의 왕국: 사랑과 자비의 질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콜로 1,12-20)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 1,13) 이 “아드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천상 왕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사랑과 은총의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향해 존재합니다(콜로 1,16).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분은 새로운 아담이시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통치를 다시 세우신 분이시다.”(Adv. Haer. III,2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주적 재창조의 질서, 곧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시는 사랑의 권능이다.
5.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는 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교회를 통해 드러내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은 그 머리이시다(콜로 1,18).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의 힘을 교회 안에 흘려보내시며, 모든 구성원을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이 통치는 강제나 권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화해의 봉사로 실현된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생명의 임금으로 오셨듯이, 신자들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을 봉사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왕직에 참여한다.”(36항)
6. 결론: 낙원의 약속, 오늘의 부르심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초대의 말씀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그리스도의 왕국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미 그분의 낙원 안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위의 임금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믿고, 그분 사랑의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강제의 왕권이 아니라 초대의 왕권이다. 그분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왕국을 따르는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길, 자비의 길, 사랑의 길이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김건태 신부님_그리스도 우리의 임금
[말씀]
■ 제1독서(2사무 5,1-3)
기원전 11세기 말엽 다윗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규합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내며, 이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를 맞이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이 연 이 시대는 이후의 역사 속에서 궁극적 승리의 상징으로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지상에서의 제한된 승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완성될 영원한 승리,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실 승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기나긴 영적 발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제2독서(콜로 1,12-20)
바오로 사도에게 하느님 사랑의 승리의 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 이 힘은 시작부터 창조의 세계를 꿰뚫는 힘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며,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세상 종말까지 이어질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입니다. 세상 만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화해의 역사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복음(루카 23,35ㄴ-43)
거의 2000년 전부터 거듭되어 온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한 모든 논쟁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 이미 그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실패작으로 잘못 판단한 주위의 구경꾼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있으나,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중에 있는 마음이 가난한 죄수 하나는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의 힘을 고백함과 아울러, 그분이 완성하실 사랑의 왕국을 희망함으로써 왕국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부여받습니다.
[새김]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하느님 나라는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는 나라이며, 이 세상의 나라와는 달리 오로지 사랑 하나만으로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성부의 뜻을 따라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성자께서 보여주셨던 바로 그 사랑, 세상과 인간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으로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이 사랑으로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똑같은 사랑으로 역사가 완성될 것이며, 그러기에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느님 나라 앞에서 우리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 주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분명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일꾼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한 해를 살면서 마냥 부족했던 우리 모두를 그래도 초대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사랑 실천으로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힘차게 고백할 때입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 실천이 모여 위대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족했던 신앙의 한 해를 정리하는 가운데, 우선은 깊어만 가는 추위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없는지 살피고, 사랑 실천으로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따라나서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신앙의 한 해를 잘 마감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설정한 ‘성경 주간’에, 올 한 해 성경을 가까이하며 부족한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더욱 다져진 신앙으로 새로운 신앙의 한 해를 맞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기억에 남는 한 주간 되기를 두 손 모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