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1월26일 수원 교구 묵상글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13:35 조회수25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시련을 통한 결실

 

우리는 흔히 이웃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들이 이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찬송으로 화답해주리라 기대하지만, 환상으로 그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메시지가 그들에게 우리를 반대하거나 트집 잡는 빌미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 답답한 일이지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때로 혁신적이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각자의 생활 습관 또는 생각하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 반대편에 섰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고 진심이 가감 없이 밝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같은 운명을 각오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거부되고 모독을 당하는 현실은 부정적인 기회보다는 긍정적인 기회로 자리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할 기회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살아온 신앙을 좀 더 곰곰이 돌이켜보고, 그 신앙이 내게 무엇이었고 내 안에 무슨 변화를 일으켰는지 등을 살펴나가면서, 지혜와 용기를 갖추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맛보게 됩니다. 비난과 공격에 익숙해지게 되고, 맞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구축하며, 확신을 다지고, 좋은 결실을 내도록 힘쓰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역설적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시련과 박해의 중심에 서 있을 때, 오히려 결실의 절정에 이르곤 합니다. 모든 시련을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시련으로 인식하며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시며, 생명의 원천인 고통과 죽음의 신비가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나? 가톨릭 신자로서의 확신 때문에 시련에 놓이거나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나?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다면, 아마도 내 신앙에 대한 확신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지나치게 고요한 신앙생활을 해 왔거나,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나 늘 주위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제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모든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그분의 자녀답게 외치고 행동하는 신앙인, 거짓과 불의와 분열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생기 넘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와 시련이 올 것을 경고하신다.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길이 절대 쉽지 않음을 보여주시며,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살피신다는 위로와 확신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12절) 제자들은 재판관과 임금 앞에 끌려가고, 감옥과 시련을 겪었다. 교회사 속에서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아왔고, 오늘날에도 죽음의 문화, 신앙 배척 등 다양한 형태로 박해는 계속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이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과 생명 전체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 날에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살아날 것을 이미 준비해 두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참된 신앙인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박해는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며, 그 믿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De Civitate Dei, XX, 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머리카락 수까지 세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 모든 삶과 작은 고난까지 세심하게 보살피신다는 표시이다.”(Homiliae in Lucam, 60)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세상과 세속적 가치, 죽음의 문화가 믿음을 흔들지 못하도록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보호하심을 신뢰하라. 우리의 작은 고난과 노력,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신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라. 시련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며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매 순간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당신께 맡기며,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충실히 살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습니다 : 배교자의 비참함 

 

 

 

 

 

서기 320년, 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의 춥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세바스테(Sebaste)라는 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 '제12군단' 병사들 중 마흔 명이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살을 에는 혹한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뼈 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고, 몸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흔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으니, 마흔 명 모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해주소서." 

 

 

 

그런데, 그들을 고문하던 총독 아그리콜라는 아주 잔인한 유혹을 준비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바로 옆,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 목욕탕 문틈으로만 따뜻하고 붉은 불빛과 하얀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저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살을 찢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한 병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한 채, "나는 예수를 모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목욕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을 찾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얼어있던 혈관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다 육신의 생명도 잃었고, 잠시의 안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반면, 끝까지 호수에 남아 추위를 견딘 39명에게는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내려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그 광경에 감화되어,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치며 옷을 벗고 그 빈자리를 채우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기어이 40명의 숫자를 채워 순교의 월계관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배교하면 처음부터 안 믿던 이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는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타협한 '호세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로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사제들을 처형하자, 신부는 살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하고 사제직을 버립니다.

 

그는 연금을 받으며 안전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삽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운 좋은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알았던 그에게 그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호세 신부님!" 하고 부르며

 

조롱했고, 아내는 그를 경멸했습니다.

 

어느 날 밤, 숨어 지내던 동료 사제가 잡혀가며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호세는 아내의 "가지 마요!"라는 호통에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는 안전한 방구석에서 홀로 울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 그분을 배신하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등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아예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둠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신앙인이 박해나 고통이 힘들다고 해서 세상으로 도망치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질식'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스승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은돈 30냥'이라는 구명조끼를 챙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3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상받은 현명한 처세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불에 덴 듯 괴로웠고, 결국 그 돈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앙인이 뒤로 물러서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뿐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56세에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파산했고, 빚쟁이들은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으며,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까지 왔습니다.

 

그는 도망치거나 신을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음표 하나하나에 쏟아부었습니다.

 

24일 후, 그가 작곡을 마쳤을 때 하녀는 그가 눈물 범벅이 되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느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양인 『메시아』 중 '할렐루야'입니다.

 

헨델이 파산과 질병이라는 박해를 피했다면, 그는 그저 빚쟁이에 쫓기는 노인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에(인내), 그는 천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만두면 편해져. 적당히 타협해. 저 따뜻한 목욕물(세상)로 돌아가."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신앙을 버리고 얻은 평화는 호세 신부의 비참함이요, 유다의 밧줄일 뿐입니다.

 

이미 빛을 본 여러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죽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지금 겪는 이 시련을 뚫고 나가십시오.

 

헨델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스테파노처럼 박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그곳은 우리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성서 주간-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21,13) 

 

 

 

'고통은 나의 믿음을 알게 해 주는 척도!' 

 

 

 

오늘 복음(루카21,12-19)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재난의 시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21,12-13)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4-15)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열두 사도들이었고, 교회 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와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진 박해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죽음의 순간에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했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박해와 미움이,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예수님을 증언할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참고 견뎌내야 하고, 고통과 시련 앞에서 포기하거나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깐 넘어졌다하더라도 얼른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은 일이 뜻대로 잘 될 때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할 때 그가 보여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13, '인내') 

 

 

 

(~ 1역대25,3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