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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27일 수원 교구청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09:12 조회수44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종말과 재림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신 다음,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영광 속의 재림을 미리 보여줄 표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사업을 이어나갈 제자들과 이들을 기초 삼아 세운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 수준을 점검하고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하십니다.

 

 

세상의 종말

 

‘마지막 때’ 하면,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서는 우주적 재앙과 전복의 성격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때로는, 복음서에 예고된 이러저러한 표징이 이제 도래했다고 확인해줄 누군가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은 아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언제 올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허락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 아버지 이외는 누구도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여러 차례 확언하셨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때에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리스도는 정녕 인간을 향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근원적인 변화의 중요성과 규모는, 그것들이 세상 종말을 학술적으로 묘사해주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 재림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오셨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나타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사람들에게 속량의 날, 선의의 사람들이 기다려온 모든 것이 성취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파멸과 재앙으로 돌아갈 세상을 원치 않으시고, 허무로 운명지어진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하고, 선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선성 앞에 모든 것을 꽃피울 세상과 인류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다시 뵈려는 열망과 오로지 그분 안에 머물고자 하는 열정으로 살아온 신앙의 선조들, 곧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상의 종말을 고대하며, “하늘의 세력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었던” 사람들, “속량이 가까이 왔음”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또한 기다리는 마음, 신앙의 선조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며 그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흔들리거나 포기하는 일 없이, 선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더 기도하고 더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하루,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세상 종말을 예고하신다. 세상은 때로 두려움과 혼란 속에 놓일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깨어있고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예루살렘의 파멸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회개와 불순종에 따른 경고이다. 이어서 종말과 환난을 말씀하시며, 신자들에게 두려움 없는 깨어있음을 강조하신다. 해와 달,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신성으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신자들을 구원하신다(28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종말의 표징은 믿음을 시험하고, 신자들을 연단시키는 도구이다. 두려움 대신 믿음과 소망으로 맞이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De Civitate Dei, XX, 25)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강조한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보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모든 신자가 깨어있는 삶과 영적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알리는 것이다.”(Homiliae in Lucam, 79)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환난과 종말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에 큰 재난과 박해가 닥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영적 깨어있음과 신앙생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두려움과 집착으로 가려지지 않도록, 매일 기도와 묵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 재림의 소망 속에서 살라: 주님의 재림은 단순한 미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적과 신앙 여정을 완성하는 영광의 순간이다. 

 

예수님은 종말의 환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것을 약속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대신 희망으로, 세상 걱정 대신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당신의 재림과 영광스런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타겟 픽세이션(Target Fixation)의 법칙: "보는 곳으로 간다" 

 

 

1240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잔혹하기로 소문난 이슬람의 사라센 군대가 수도원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녀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원장 수녀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시 원장이었던 성녀 클라라는 병석에 누워 꼼짝도 못 할 만큼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성체광(Monstrance)을 높이 쳐다들고 성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녀의 눈은 담을 넘으려는 칼과 창, 그리고 살기 등등한 적군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성체광 안에 계신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적들을 보지 않고 주님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을 섬기는 이 여종들을 지켜주소서."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체광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압도적인 빛과 영적인 기운에 눌린 사라센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습니다.

땅의 군대를 이긴 것은 칼이 아니라, 하늘을 응시하는 한 수녀의 시선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께 '타겟 픽세이션(Target Fixation, 주시 이끌림 현상)'이라는 법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보면 간다"는 속담이 아닙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발견된 무서운 뇌과학적 현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지상의 적군 벙커를 폭격하기 위해 급강하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폭탄을 투하하고 기수를 올려야 할 시점에도, 수많은 베테랑 조종사들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자신이 맞추려는 타겟(벙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계속 돌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격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타겟에 충돌해 폭사했습니다.

뇌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응시하는 순간, 생존 본능마저 마비되고 몸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타겟 픽세이션'의 기원입니다. 

 

이 죽음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F1 레이서들입니다.

시속 300km로 코너를 돌 때, 벽에 부딪힐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전설적인 레이서 아일톤 세나는 신입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벽을 보지 마라. 벽을 보는 순간 네 차는 벽에 박힌다. 트랙의 탈출구(Exit)를 보라." 

 

사고가 나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보면, 드라이버의 헬멧(시선)이 트랙이 아니라 충돌할 벽을 향해 고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으면 안 돼, 박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벽을 쳐다보지만, 뇌는 부정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선이 가는 대로 핸들을 꺾어버립니다. 벽(절망)이 아니라 길(탈출구)을 봐야 빠져나갑니다.

사람은 보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이 시선의 법칙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입니다.

칠흑 같은 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기적처럼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은 오직 '탈출구'이신 예수님의 눈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물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기록합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겁에 질려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마태 14,30). 

 

파도가 갑자기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중력의 법칙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 바람(벽, 장애물)'으로 옮겨가 '타겟 픽세이션'이 일어난 순간, 그의 영혼과 육체는 그 공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위를 걷고, 바람을 보면 빠져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의 징조를 예고하십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절할 것이다."

전쟁, 지진, 기근... 세상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재난(벽)을 쳐다봅니다.

뉴스를 보며 공포에 떨고, 무너지는 경제를 보며 한숨 쉽니다.

재난에 시선이 고정되어 영혼이 그쪽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F1 레이서와 같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세상은 땅을 보며 "아이고 죽겠네" 하고 벽에 부딪히지만, 신앙인은 고개를 들어 구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 곧 우리의 영원한 '탈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이 흔들릴수록 하늘을 봐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 하권에는 이 시선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옵니다.

아람 군대가 도탄 성을 겹겹이 포위했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적군(벽)'만 보고 공포에 질려 소리칩니다.

"아이고,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그는 타겟 픽세이션에 걸려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평온하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편이 그들보다 더 많다." 그리고 사환의 눈을 열어줍니다.

사환의 눈이 열리자, 그는 보았습니다.

적군보다 더 크고 웅장한 불마와 불수레가 온 산을 뒤덮고 엘리사를 호위하고 있는 것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땅을 본 자는 절망했고 하늘을 본 자는 승리했습니다. 

 

자연 만물도 이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해바라기를 보십시오.

해바라기의 뿌리는 어둡고 축축하고 지저분한 흙 속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땅을 보며 "아이고 더러워라" 하지 않습니다.

해바라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태양의 궤적만을 쫓아 고개를 쳐듭니다.

진흙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머리는 태양을 향해 있기에, 해바라기는 썩지 않고 밝고 노란 꽃을 피워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땅에 있는 뱀만 쳐다보다가 독이 퍼져 죽어갔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는 대신,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다."(민수 21,8). 

 

이것은 '시선의 훈련'입니다.

독이 퍼지는 고통 속에서도 억지로 고개를 들어 높이 달린 것을 바라보는 행위,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습니까? 경제적 위기, 질병, 실패라는 벽이 여러분을 향해

달려옵니까? 그 벽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전투기 조종사들처럼 그것만 보다가는 그곳에 추락합니다.

시선을 돌려, 그 너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보는 곳으로 간다."

이 법칙을 잊지 마십시오.

재난을 보면 재난 속으로 빠지지만, 주님을 보면 주님 품으로 가게 됩니다.

오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여러분의 구원자를 바라보십시오.

그 시선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 

 

오늘 복음(루카21,20-28)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이제 3일이 지나면 새로운 한 해인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끝자락에 와 있는 요즘 듣는 독서와 복음은 끝에 대한 말씀, 곧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종말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라는 분명한 인식과 그 인식에 바탕을 둔 우리의 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이 준비로 '착한 죽음, 곧 선종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베네딕토 13세 교황님의 기도로 알려진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함께 바치며 묵상해 봅시다!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 

 

자애 깊으신 주 예수님,

당신의 수난과 피땀과 죽음으로 청하오니,

제가 준비 없는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지극히 인자하신 주 예수님,

당신이 당하신 극심한 고통과

혹독한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청하오니,

제가 준비없이 또 성사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저의 하느님이신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모든 고통과 성혈과 상처로 청하오니,

저로 하여금 황급히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당신이 만드신 이 생명을 황급히 부르지 마시고

죄를 보속할 시간을 주소서.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고 찬미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 안에서 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주 예수님,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표시인

십자가상 다섯 상처로 청하오니,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그 거룩한 피로 구원된 이 종이

착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2역대2,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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