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2월 1일 수원 교구 묵상글 외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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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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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9:09 | 조회수42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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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희망과 믿음의 대림시기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첫 인물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을 만납니다. 100명의 군졸을 거느리는 지휘관이었으니, 나름대로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집안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 기대하였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으로 비참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않고서, 자기의 세력 안에 있던 공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공간, 행복과 평화를 보장해준다고 믿어 온 공간, 편안했지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이었던 자기 집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옵니다.
이 백인대장은 체면과 염치를 뒤로 하고, 대들 듯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분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는 행위입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드러누어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내나 자식, 부모나 가까운 친지가 병들어 밖으로 나와 주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한낱 종에 불과한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잣대를 들이대기 전, 그의 인성이 돋보입니다. 어찌 보면 바로 그 인성이 이 이방인을 주님께 다가설 수 있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인성은 다음 단계에서 빛을 더욱 발해, 신앙의 단계로, 신앙고백의 단계로 이끌어 갑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하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이 백인대장을 신앙인들의 모범으로 올려놓기에 이릅니다.
대림시기는 지금의 내 자리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는 삶, 좁디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삶을 사는 시기임을 이 이방인 백인대장을 통해 다시금 배웁니다.
대림시기는 이 이방인 백인대장처럼 희망하고 믿는 시기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는 외침으로 우리의 신앙을 힘차게 고백하는 시기임을 가슴에 새기며, 성탄의 길을 향하여 오늘도 열심히 달려 나가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8,5-11: 한 말씀만 하소서.
오늘 복음은 가파르나움의 로마 백인대장이 주님께 나아와 종의 치유를 청하는 장면을 전한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10절) 하실 만큼 위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백인대장은 단순히 종의 치유를 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힘과 권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이 고백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도 연결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3 이하). 하느님의 말씀은 곧 행위이며, 능력이다. 백인대장은 이 능력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충만히 깃들어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두고 “그는 기적 자체보다도 말씀의 힘을 더 믿었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믿은 자가 된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Homilia 26,2)라고 말한다. 즉, 눈으로 확인하려는 요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말씀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또한 그는 겸손히 고백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8절) 이는 단순히 외적인 겸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서 자기 비참을 자각하는 참된 겸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지만, 겸손한 자 안에 친히 거처하신다.”(Sermones 62,1). 백인대장은 바로 이 겸손 속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이 아니라, 마음에 모셨던 것이다.
대림은 주님을 맞이하는 기다림의 시기이다. 백인대장의 태도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우리는 미사 전 성체성사에서 같은 고백을 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기도는 바로 오늘 복음의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친히 오셔서 영혼을 치유하시는 사건임을 믿는 고백이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하늘나라의 보편성을 선포하신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이스라엘이라는 혈연적·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 이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신 말씀이다. 교회 헌장도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따라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16항).
따라서, 우리 또한 대림 시기에 자기 혈통이나 형식적 신앙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백인대장의 믿음과 겸손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영적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마태오 8,5-11
말씀만으로? 마귀도 성경박사였습니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의 본당 신부였던 페라마일 신부는 거구에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진, 율법과 교회법에 정통한 엄격한 사제였습니다. 반면 그 앞에 서 있는 14살 소녀 베르나데트는 천식으로 숨을 헐떡였고, 글을 읽을 줄도 몰랐으며, 교리 반에서 낙제한 둔재였습니다.
신부는 소녀를 다그쳤습니다. "이 거짓말쟁이야! 그 부인이 너에게 진흙탕 물을 마시라고 했다고?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으라고 했다고? 하느님은 질서의 하느님이시다. 그런 비이성적인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어!" 신부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신학 서적과 법전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방대한 '지식'으로 소녀의 체험을 난도질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신학적으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그 부인이 "가서 씻으라"고 했기에 흙탕물을 파서 얼굴에 발랐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기에 무릎이 까지도록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지식이 아니라 '순종'만 있었습니다.
3월 25일, 부인이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베르나데트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주문처럼 되뇌며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Immaculate Conception)'라고요!"
그 순간, 거인 같던 페라마일 신부는 감전된 듯 얼어붙었습니다. '원죄 없는 잉태'. 그것은 불과 4년 전 교황 비오 9세가 반포한, 라틴어를 모르는 무식한 시골 소녀는 결코 알 수 없는 최신 교리 용어였습니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맑은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교리를 아시지만, 저는 그분을 압니다. 그분은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고, 저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날, 신학 박사였던 신부는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가 책상 위에서 수십 년간 연구했던 하느님은 침묵하셨지만, 글도 모르는 소녀가 진흙탕 속에서 '순종'으로 파낸 샘물은 기적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성경을 많이 알면 믿음이 좋아진다"고 착각합니다. 개신교 형제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말씀 연구에 몰두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성경 공부 수료증이 믿음의 보증수표인 양 여깁니다. 물론 말씀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아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을 보십시오. 그는 시편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예수님과 논쟁했습니다. 사탄은 성경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결정적인 하나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은 알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성경 지식만 있고 순종이 없는 신앙은, 자칫하면 마귀의 신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증인들이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를 보십시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벌거벗은 거지를 보았을 때, 교리를 따지는 대신 자신의 붉은 망토를 반으로 잘라 덮어주었습니다. 그 사랑의 순종을 행한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덮어준 망토를 입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공부해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천주의 성 요한(John of God)은 거리의 병자들을 자신의 등에 업어 날랐습니다. 어느 날 밤, 위독한 환자를 업고 가는데 너무 무거워 쓰러질 뻔했습니다. 그때 환자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빛나는 얼굴로 변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아, 네가 나를 업어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업어주겠다." 그는 환자들의 고름을 닦아주는 손끝에서, 책상머리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모두 이런 식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죽고 사는 '순종의 세계'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도 상관 밑에 있고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권위에 순종할 때 자신에게도 권위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하느님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단박에 알아본 것입니다. 순종해 본 사람만이 권위를 알아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부의 경험으로는 고기가 없었지만,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며 자기 생각을 꺾고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듯한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연회장은 몰랐지만, 말씀대로 물을 떠다 나른 하인들은 그 기적의 출처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믿음이 부족해서 실천을 못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습니다.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통독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도로시 데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빵을 나누는 순종을 할 때 비로소 빵이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들을 껴안으라는 내면의 소리에 순종하여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쓴맛이 단맛으로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혐오를 이기고 순종했을 때, 그는 나병 환자 안에서 달콤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성경 공부를 더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의 실천을 하나 정하십시오. 내 자존심을 꺾고 배우자에게 사과하는 순종, 내 시간을 쪼개어 힘든 이를 돕는 순종. 그 순종의 현장에서 여러분은 베르나데트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복잡한 신학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을 실천했을 때 그분이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ㄴ)
'구원의 확실한 보증인 믿음과 사랑!'
오늘 복음(마태8,5-11)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8,6)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8,7) 하시자, 백인대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8,8-9)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이어서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8,11) 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 지휘관입니다. 그가 로마의 군대 장수였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백인대장이 병든 자기 종에게 사랑을 드러냅니다. 종의 불쌍한 처지를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알립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사랑(삶)'이 '이제와 영원한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겸손한 고백이 큰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우리는 매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모시기 바로 직전에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치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이 기도를 잘 바칩시다!
(~ 2역대21,20)
송영진 신부님_<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날.>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5-11)”
1) 이 이야기는 치유 기적을 전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이방인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병마’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낫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병마를 지배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은 곧
‘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백인대장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은 그 백인대장이
최초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경우는, 예수님을 향해서 직접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점에서
최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20,28).>
대림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성탄절에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절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이 되실 아기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하느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이 인간의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날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2)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는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만일에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즉 신성 모독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은 일’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면, 처음부터 하느님으로
오셔서 인간들을 곧바로 구원하시지 왜 아기로 태어나셔서
사람들과 똑같이 사셨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5-16ㄱ.19-20).”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의 아기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메시아’이시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실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경축하는 이유이고,
대림시기를 지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 11절의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는 나라이고, 어떤 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이든지
누구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1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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