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2월 12일 수원교구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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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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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2-12 | 조회수50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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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상향적 신앙생활
대림시기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 따라 꿋꿋하게 걸어가는 시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보고, 지난 주일 세례자 요한의 외침대로, 골짜기라면 메우고, 산과 언덕은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는 정리 작업, 한 마디로 길을 곧게 하는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주님의 길인지,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을 향하는 길인지 점검하고 반성하고 새롭게 설정하는 노력이 앞서야 합니다.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골짜기 곧 상처로 인해 깊게 패인 마음, 산과 언덕 곧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교만, 굽은 데 곧 남의 마음을 왜곡하는 비뚤어진 마음, 거친 길 곧 자기 것만 향해 내닫는 고집스러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골짜기, 산과 언덕, 굽은 데, 거친 길 등,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또는 이웃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 그것도 깎아지른 듯한 외고집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을 잣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판단하니, 그런 길만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대림시기를 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시선은 마땅히 상향적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향해야 합니다. 나아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주위의 신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 본받으려는 마음,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해도 나도 언제가 그와 같은 신앙을 살아보겠다 다짐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 깎아내리거나 헐뜯는 일은 단연코 삼가고 피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를 고집한다면, 자기 자신도,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도 피폐화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의 신앙 자세를 눈여겨보고 인정하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아기 예수님을 뵙기에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를 향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 맞이에, 오늘 하루 더욱 든든하고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서로 놀이하며 불평하는 비유를 통해, 동시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도, 또 당신 자신도 거부한 모습을 고발하신다. 요한은 금욕과 단식으로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그는 마귀가 들렸다.”(18절) 했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기쁨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먹보요 술꾼”(19절)이라 비난했다. 성 예로니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한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서로 불평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개를 권하면 듣지 않고, 기쁨을 노래하면 응답하지 않는다.” (Commentariorum in Matthaeum II, 11,16) 이는 곧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어떤 형태로든 거부하는 마음의 완고함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덧붙인다. “주님께서는 요한과 당신을 서로 대조시키며 말씀하신다. 이는 두 방식이 모두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며, 목적은 하나였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를 거부하였다.”(Homiliae in Matthaeum Hom. 37,1) 즉,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다가오셨지만, 믿음 없는 마음은 어떤 형태의 은총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여기서 지혜란 곧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당신의 일들로 드러난다. 요한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으로, 그리고 믿는 이들의 변화된 삶으로 나타난다.”(Sermo 33,3) 따라서 요한의 단식과 예수님의 식탁 친교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지혜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혹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은총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오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준엄한 목소리로, 어떤 때에는 예수님처럼 위로와 기쁨으로 오신다. 그 두 길 모두가 구원의 길이다.
“지혜는 그 행위로 드러난다.”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달라진다. 죄에서 벗어나 회개의 삶을 살게 되고, 동시에 자유와 기쁨 안에서 형제들과 식탁을 나누게 된다. 교회는 이 두 차원을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대림 시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마음을 열어, 요한의 목소리 안에서 회개의 부르심을, 그리스도의 잔치 안에서 기쁨의 초대를 함께 받아들이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삶의 증거가 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국소 마취된 신앙: 손끝의 쾌락에 갇혀 심장의 고통을 잊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들이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 『에비에이터』의 실제 모델이자 당대 최고의 억만장자, 영화 제작자, 비행사였던 하워드 휴즈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다 가졌습니다. 막대한 부, 하늘을 나는 명예, 할리우드 여배우들과의 염문까지, 그의 '손끝'에는 늘 쾌락과 성공이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세균 공포증과 강박증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펜트하우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그는 발가벗은 채 지냈습니다. 세균이 옮을까 봐 티슈 상자를 신발처럼 신고 뒤뚱거리며 걸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소유했으나, 정작 마음의 평안은 단 한 조각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체의 감각과 욕망에만 치중하느라 영혼의 행복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그의 마지막은, 화려한 펜트하우스가 사실은 차가운 감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국소 마취된 신앙인'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수술할 때 국소 마취를 하면, 몸의 다른 부분은 멀쩡한데 딱 그 부분의 감각만 사라집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욕망'이라는 마취제를 맞고 영혼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를 저는 '초점의 오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마치 욕망이라는 현미경으로 눈앞의 이익만 확대해서 보느라, 저 드넓은 하늘을 보여주는 망원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는 단순히 똑똑한 머리가 아닙니다. 지혜란, 손끝의 찰나적인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 즉 '마음의 행복'을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라고 탄식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 왜 그들은 반응하지 않을까요? 귀가 먹어서가 아닙니다. 자기들만의 놀이, 자기들만의 욕심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심장의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무감각, 아케디아(Acedia)입니다.
이렇게 손끝의 욕망에만 집중하며 국소 마취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비극을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마틸드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 초대받은 그녀는 돋보이고 싶은 허영심, 즉 '손끝의 쾌락'을 위해 부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립니다. 파티에서의 하룻밤은 꿈처럼 화려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부러움, 찬사...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돌려주기 위해 막대한 빚을 집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하녀처럼 일하며, 고운 손은 거칠어지고 얼굴은 늙고 추해집니다. 10년 후, 빚을 다 갚고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난 마틸드는 충격적인 진실을 듣습니다. "어머, 마틸드!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안 되는 모조품이었다고!"
보십시오. '진짜 행복'이 아닌 '가짜 욕망'을 좇은 대가는 이토록 참혹합니다. 찰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청춘을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한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라고 선언합니다. 진짜 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예화가 바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 우깁니다. 솔로몬은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누어 주어라"라고 판결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내 것도 안 되고 네 것도 안 되게 그냥 나누자"며 동의합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소유'라는 손끝의 욕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어머니는 울부짖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진짜 어머니는 내 품에 안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아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생명의 행복', 즉 전체를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가 손끝의 욕심을 내려놓고 심장의 사랑을 택했을 때, 지혜로운 왕은 판결합니다. "저 여자가 진짜 어머니이다."
지혜는 이렇듯 행동으로, 그 결과로 드러납니다. 부분을 포기함으로써 전체를 얻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 시기는 우리 영혼의 마취를 풀고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일화가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교회와 세상의 산적한 문제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거대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나?" 하는 책임감과 걱정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한아, 교회의 주인은 너냐, 아니면 성령이시냐?" 잠에서 깬 교황님은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교회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저는 이제 자러 갑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자아의 욕망, 내가 해결사라는 '부분적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심장의 평안'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바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위대한 봄을 열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손끝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내 욕심을 채우려는 현미경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망원경을 들어봅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장터의 피리 소리에 기쁘게 춤추고, 이웃의 아픔에 진심으로 가슴 칠 수 있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11,16)
'예수님의 탄식!'
오늘 복음(마태11,16-19)은 '예수님의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세대의 악한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11,16-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는 예수님 때의 세대만이 아니라, 이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바로 오늘의 세대, 지금 우리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대도 똑같지 않나요?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고, 매일 미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는 않나요?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에 탄식하고 계시며, 여전히 그런 우리의 죄들이 대못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탄식(슬픔)은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 다시 부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은 언제나 참으로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돌아가는 회개뿐'입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이사48,18)
(~ 느헤2,20)
송영진 신부님_<도대체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1)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질문으로 바꾸면,
“도대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그렇게 정말로 많은 사람이 ‘회개의 세례’를
받긴 했는데,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3,7-8).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처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카 6,17).”
그런데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거의 대부분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나중에는’ 거의
대부분 떠나버린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끝까지 남아 있었던 사도들과 몇 명의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기를
희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떠나버린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만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희망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갈라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얻기를 희망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2) ‘가난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고,
‘부유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난함과 부유함의 차이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의 차이에서 생긴 일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을 부러워하면서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이들이 많고, ‘세속의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느님을 섬기지는 않고 재물만 섬기는
부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물질적인 부유함에 취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부자’와 물질적인 부유함만을 원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빈자’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의 생활을 한 것은,
회개와 보속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간절한 희망’에서 ‘간절한 행동’이 나오는 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극기고행을 싫어한 사람들은 아마도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이 별로 간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세리들처럼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저런 죄인들은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이 없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심판은 피하고 싶지만 회개와 보속은 너무 힘들어서 싫다고
생각하거나, 구원은 받고 싶지만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과
함께 구원받는 것은 싫고 ‘나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회개와 구원을 자기 마음대로,
또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4)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도,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신 일도 다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받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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