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03.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 임신 10–28주 / 대림 3주)
생명을 향한 거룩한 응답
#되어감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루카복음 1장 26절에서 38절의 말씀 안에서 생명을 향한 거룩한 응답을 만난다.
수태고지 이야기는 기적의 장면이기보다 한 인간이 자기 존재로 응답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이미 완성된 모습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아직 보이지 않고, 아직 설명되지 않는 생명의 시작 앞에서 기다리신다. 그 기다림 속에서 마리아의 자유로운 응답이 울려 퍼진다.
마리아의 “예”는 상황을 다 이해한 뒤의 동의가 아니다.
앞날이 보장된 선택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도망치지 않고 질문하며, 결국 자기 삶 전체를 열어 둔다.
이 응답은 복종이 아니라 존재의 결단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찬란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지 않았다.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생명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눈에 띄지 않았고, 보호받아야 했으며,
고요히 자라야 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시간부터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다.
임신 10주에서 28주 사이의 태아는 아직 세상의 언어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 생명은 멈추지 않고 자란다.
심장은 쉬지 않고 뛰고, 얼굴은 형성되며, 몸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이 시간은 불완전함의 시간이 아니라, 되어감의 시간이다.
존엄은 완성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존엄은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함께 주어진다.
태아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고, 자라고, 맡겨져 있다.
마리아가 받아들인 것은
단지 한 사건이 아니라 한 생명이었다.
그 생명은 계획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이었다.
하느님의 일은 마리아를 대신하지 않았고,
그녀의 몸과 삶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 관계 안에서 생명은 보호받고 존중받는다.
오늘의 우리는 자주 묻는다.
언제부터 인간은 존엄한가.
기능을 가질 때인가, 말을 할 수 있을 때인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인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대림시기의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호하려는 선택이다.
설명되지 않아도 응답하는 용기다.
생명을 향한 거룩한 응답은 언제나 잠잠하다.
그러나 그 결단 하나가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작은 이의 기도
주님,
아직 말하지 못하는 생명을
당신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설명되지 않아도 응답할 수 있는
결단의 용기를
제 안에 길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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