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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8일 수원 교구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6-01-08 조회수85 추천수2 반대(0) 신고

건태 신부님_은혜로운 해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교 사명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의 유다교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 중에 선포되고 개시됩니다. 유다교 전례에서 안식일에는 보통 두 개의 성경 본문이 봉독되었습니다. 하나는 ‘토라’ 곧 오경에서 택한 본문으로서 율법학자가 읽고서 해설했으며, 다른 하나는 ‘느비임’ 곧 예언서에서 취한 본문으로서 30세가 된 성인이면 ‘누구든지’ 읽고 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누구든지’는 회당장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지명 또는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막 30세에 이르신, 유다교 전통에 따라 공적인 자리에 서서 말할 자격이 부여되던 나이에 이르신 예수님이 지명을 받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예언서 가운데 당신의 직무를 예고하고 있는 부분을 펼쳐 드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봉독하신 독서는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 이사야의(1-39장) 정신을 이어받아, 바빌론 유대시대에 흔히 2이사야라 불리는 예언자가 40-55장을, 유배시대 이후 제3이사야가 56-66장을 남겼습니다. 유배시대 이후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재정착에서 비롯된 각종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던 시대, 따라서 조언과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절실했던 시대였습니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을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 아람어로는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상을 위한 구원사업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이 뜻을 완수하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기름으로 축성되고 파견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해방,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기, 한 마디로 은혜로운 해 선포에 당신의 사명이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물론 말씀으로만 이루어지는 선포가 아니라, 온몸을 투신하여 이루어내실 선포를 말합니다. 당신의 구원 사업 일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완성까지 담고 있는 선포입니다.

 

루카 복음저자는 유다교에서 은혜로운 해, 곧 희년(禧年)이라는 표현을 빌려오면서도, 이 세상에 예수님 오심을 비롯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한 지상에서의 구원사업 전체를, 끝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리라는 약속 일체를 은혜로운 해의 핵심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가슴에 더욱 깊이 새겨집니다.

 

이 한 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따돌림 받고 있는 사람들, 억울하게 묶여 있거나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펼치며 그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도 힘차게 외치면서,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4,14-22: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구절을 낭독하신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모든 약속과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물리치신 뒤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셨다. 성 치프리아노는 “성령이 머무르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충만히 따를 수 없다.”(De Oratione Dominica, 9)고 했다. 곧, 예수님의 사명은 단순한 인간적 노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말씀을 살고 실천하려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을 가리킨다.”(Enarrationes in Psalmos 70,1)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바로 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죄와 악의 사슬에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며,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가 “잡혀 있는 자들”이고 “눈먼 자들”임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고, 참된 시야를 가질 수 없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의 이 말씀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먼 미래를 말하지 않으셨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말씀은 단순히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며, 우리 눈앞에서 성취된 것이다.”(Homilia in Matthaeum 15)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할 때 “오늘” 성경은 완성된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펼치셨듯이, 교회는 세상 안에서 복음을 펼친다”(Commentarii in Lucam, fr. 32)라고 했다. 오늘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오늘 이루어졌다.’ 선포하신 것처럼, 교회는 매 순간 성경이 지금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시고 “오늘 이루어졌다.”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고, 묶여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할 때,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제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해 나가야 할 차례인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듣지 못할까?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 안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고 계십니까?

 

오늘 저는 조금 엉뚱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한 미식가가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집어 들고는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이 메뉴판의 폰트 좀 봐. 고딕체와 명조체의 조화가 절묘하군.

 

음식 설명은 또 얼마나 문학적인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유기농 양상추'라니... 재료의 원산지 표시도 아주 훌륭해." 

 

그는 무려 1시간 동안 메뉴판을 정독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감명 깊은 구절을 노트에 필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를 두드립니다.

 

"아, 배부르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 하고는 식당을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그는 정작 음식은 시키지도 않았고,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습니다.

 

메뉴판은 종이일 뿐, 음식이 아닙니다.

 

종이를 아무리 씹어 먹어도 배가 부를 리 없지요.

 

메뉴판을 봤으면 주문을 하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내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꼭 이 '메뉴판을 먹는 미식가'와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천국 잔치의 메뉴판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 시간에 모여 앉아 감탄합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원이 참 오묘하네요." "바오로 사도의 문체는 정말 논리적이야."

 

그렇게 연구하고 밑줄 긋고 필사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음식은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혼은 늘 굶주려 있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닮지 않았을까?"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시던 시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가톨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우리 평신도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할 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지 않고, 내 본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이 계속되면 제2의 간디 같은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유학 시절 겪은 일화는 우리에게 뼈아픈 일침을 줍니다.

 

간디는 성경의 산상수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교회에 들어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입구의 안내원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유색인종이 들어올 곳이 아니오. 딴 데로 가시오."

 

그 안내원과 교회 안의 백인들은 매주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훌륭한 '대본'이었지만, 그들은 그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엉뚱한 연기를 펼친 것입니다.

 

간디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예수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본(예수님)은 완벽한데, 배우(신자)가 연기를 엉망으로 하니 관객(세상)이 실망하고 극장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성취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기에, 말씀대로 사셨고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연기 대본'이 아니라

 

'연구 논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머리는 커졌는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로데 궁전의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유다인의 왕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미카 예언서를 인용하며 정답을 맞혔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장소를 정확히 연구해 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인간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온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경배하러 떠났지만, 정답을 알고 있던 박사들은 편안한 궁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정보'였지, 따라야 할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사례입니다. 

 

성경은 '구원 교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에 관한 책을 분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육화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안에 육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수님과 한 몸인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거창한 신학적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기억합시다. 당시 중세 신학자들은 성경에 수많은 주석과 해설을 달며 지식을 뽐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한 형제가 성인에게 와서 "저도 시편 주석서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복음을 '주석 없이(Sine Glossa)',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성인에게 성경은 연구해서 지식을 쌓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는 그 구절을 노트에 적거나, 집에 가서 묵상하거나, 신학적 의미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즉시' 자기 밭을 팔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수백 번 읽고, 수십 번 강론을 듣고, 성경 공부 시간에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오처럼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구절의 대본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성인이 되었고,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달달 외우면서도 관객석에 앉아 팝콘만 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대본(Script)'입니다.

 

하느님 감독님은 이미 "레디, 액션!"을 외치셨습니다.

 

카메라 불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배우인 우리가 무대 위에서 대사만 분석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년 하례식 미사에서 수원교구장 주교님은 올 해의 말씀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뽑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도 놀랐지만, 그 말씀을 한 해 동안 실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로운 말씀을 내 안에서 육화시킨다면 시간인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닮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올 한 해, 성경 전체를 다 알려고 욕심내지 맙시다. 안토니오 성인처럼, 딱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정해봅시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이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라"는 말씀이든, 하나를 정해서 그것을 내 삶으로 '성취'시켜 봅시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 메뉴판을 먹던 미식가에서 진짜 음식을 먹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수영 교본을 덮고 물살을 가르는 구조자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다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 저 사람들을 보니 정말 예수가 살아있구나."

 

아멘! 

 

이병우 신부님_제목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1.8)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희년의 삶을 살자!'

 

오늘 복음(루카4,14-22ㄱ)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61,1-2)를 펴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참기쁨과 참자유와 참해방을 주시기 위해, 육(사람)이 되셨고, 땀을 흘리셨고, 수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매일 드리는 미사를 통해 이 사랑을 확인하고 있고, 이 사랑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뻐해야 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참기쁨과 참자유와 참해방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19-20)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합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선물이 되어주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됩시다!

 

(~ 에스4,17)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회개’ 없는 복음 실천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14-22ㄱ).”

 

1) 여기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희년 선포’와 같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희년’에 대해서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희년’은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는 ‘은총의 해’입니다.

 

모든 빚이 탕감되고, 남에게 넘어간 소유지를 되찾게 됩니다.

 

규정만 보면 참으로 ‘기쁨의 해’인데,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이자율이 높아지다가 희년 직전에는

 

돈을 꿀 수가 없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다 탕감해 주어야 하니까,

 

아예 돈을 꾸어 주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명기에는, 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신명 15,1).>

 

그러니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할 사정이 생긴 사람들에게는,

 

특히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희년이 오히려 ‘고통의 해’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희년이 되면 빚이 모두 탕감될 것이기 때문에,

 

빚을 갚지 않고 희년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부작용들 때문에 희년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다가 결국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끔 선포하는 희년의 모습을 보면,

 

‘실질적인 기쁨’은 없고, 구호로만 그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2) 희년의 그런 부작용은,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기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는데,

 

인간들은 사랑보다 돈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 이기심과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시대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은총의 시대’가 되려면,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는 복음 실천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메시아 시대’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시대’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를 맞이할 자격이 없습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인간들을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일은 감방의 ‘자물쇠를

 

열어 주는 것까지만’이고, 감방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죄와 죽음’의 지배와 억압 아래에서 그냥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예수님도 그를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감방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라자로를 데리고

 

나오신 것이 아니라, 무덤 밖에 계시면서,

 

라자로에게 나오라는 명령만 하셨습니다(요한 11,43).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간 것은 라자로 자신이 했습니다.

 

살기를 원하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회개’는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죄와 죽음의 억압’은 ‘나의 내부’에도 있습니다.

 

이기심, 탐욕, 집착, 헛된 욕망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것만 회개인 것은 아니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원래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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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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