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월 9일 수원 교구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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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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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1-09 | 조회수83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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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1.9)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5,13)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자!'
오늘 복음(루카5,12-16)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온 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ㄷ)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ㄴ) 그러자 나병이 나았습니다.
나병(문둥병.한센병)은 악성 피부병입니다. 모세 오경 중에 세 번째 성경인 '레위기 13장 1절에서 46절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는 악성 피부병은 관한 규정'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이로 선언합니다.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동체 밖에서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병환자를 고쳐주심으로써 그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다시금 공동체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나병은 '소외병'입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고,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록도로 산청성심원으로, 그리고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진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나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열려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또 다른 나병환자들', 곧 '여전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과 명예 등과 같은 세상 가치에 밀려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내가 왕따시켜 놓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소외된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봅시다!
(~ 에스5,14)
이병우 루카 신부
전삼용 신부님_헌금으로도 선교할 수 있다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기쁨을 누리고 계신지요?
오늘은 조금 민감할 수 있는, 하지만 우리 신앙의 가장 정직한 부분을 건드려볼까 합니다.
바로 '돈' 이야기입니다.
성당에서 헌금 이야기를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라면서 왜 자꾸 돈을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종교를 빙자해 돈을 갈취하는 사이비가 하도 많으니, 그런 거부감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신 뒤,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아주 엄중하게 명령하십니다.
"사제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예수님은 왜 치유받은 사람에게 굳이 돈(예물)을 쓰게 하셨을까요?
사제들 밥벌이를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그 '예물'이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하는 법적인 '증거(Martyrion)'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만 "감사합니다"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존 수단인 물질을 내어놓는 행위는, 내 영혼에 일어난 은총이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영수증'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의 고수들은 이 '봉헌'을 통해 자신이 누구의 파트너인지를 세상에 증명했습니다.
거대한 굴착기 회사 르투어노 테크놀로지의 창업자 R.G. 르투어노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평생 수입의 90%를 봉헌하고 10%로만 산 '거꾸로 십일조'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부자여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30대 초반,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실패한 정비공이었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 본당 목사님을 찾아가 눈물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게 너무 속물 같습니다.
사업을 다 접고 선교사가 되어야 할까요?"
그때 목사님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설교하는 선교사도 필요하지만, 사업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업가도 필요하네."
이 말에 그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 사업이 곧 나의 선교구나.
하느님이 나의 CEO구나.' 그날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서원했습니다.
"주님, 제가 빚을 갚고 일어서게 해주신다면, 수입의 90%를 주님께 드리고 저는 10%로만 살겠습니다.
주님을 제 사업의 대주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사업이 일어섰을 때, 그는 평생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다 망한다"고 걱정하자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삽으로 퍼서 하느님께 드리는데, 하느님은 포크레인으로 퍼서 제게 다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포크레인이 제 삽보다 훨씬 큽니다."
현대에도 이런 파격적인 증거자들은 존재합니다.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유명한
릭 워렌 목사도 엄청난 인세 수입으로 돈방석에 앉았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가 타락할 것이라며
눈을 흘겼습니다.
기독교를 '돈만 밝히는 집단'이라고 비난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때 릭 워렌은 아내와 상의하여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르투어노처럼 수입의 90%를 헌금하고 10%로만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지난 25년 동안 받았던 사례비를 전액 반납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세속 언론과 대중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과감한 봉헌은 백 마디 설교보다 더 강력하게 "저 목사가 믿는 신은 돈이 아니라 예수구나" 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수많은 사람을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았다, 은총 입었다"라고 말하면서 지갑은 꽉 닫고 있다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성보다 보이는 물질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의 과감한 봉헌이 필요합니다.
성녀 캐서린 드렉셀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는 미국 금융 재벌의 상속녀로, 현재 가치로
약 5천억 원이 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그녀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5천억 원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기부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던 흑인과 인디언들을 위해 자신의 유산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전역에 145개의 선교 본부와 12개의 인디언 학교, 50개의 흑인 학교를 세웠습니다.
특히 뉴올리언스에 있는 미국 유일의 흑인 가톨릭 대학교인 '제이비어 대학교(Xavier University)'도 그녀가 설립했습니다.
그녀가 97세로 선종했을 때, 그 어마어마했던 개인 재산은 '0원'이었습니다.
그녀의 빈 통장은 그녀가 '세상의 상속녀'가 아닌 '하느님의 딸'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신분증이었습니다.
도미노 피자의 창업주 톰 모너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억만장자였던 그는 C.S. 루이스의 책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교만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1998년 회사를 매각하고 "억만장자의 빈곤 서약"을 실천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중단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가톨릭 교육 재단에 헌납한 뒤, 자신은 검소한 생활비만 남겼습니다.
억만장자가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선택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믿는 가톨릭 신앙의 진정성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 나오는 주인공 바베트를 닮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거금을 몽땅 털어 마을 사람들에게 천국 같은 한 끼를 대접하고 빈털터리가 된 그녀.
"이제 가난해서 어쩌냐"는 걱정에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던 그녀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을 '소비'나 '지출'이 아니라 '작품'으로 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봉헌금과 교무금, 감사헌금은 교회의 유지비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은총이 진짜입니다"라고 세상과 하느님 앞에 제출하는 증거물입니다.
우리는 봉헌으로도 선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못 하는 일이기에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약으로 유명한 콜게이트의 창업자 윌리엄 콜게이트는 16세 때 집을 떠나며 뱃사공에게 들은 조언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면 반드시 그 돈의 주인인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리게. 그러면 자네는 성공할 걸세."
그는 사업이 번창할수록 십일조를 20%, 30%, 나중에는 50%까지 늘려나갔습니다.
그는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잠시 맡기신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의 기업이 200년 넘게 장수하는 비결을 그의 투명한 봉헌에서 찾았습니다.
은총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즉시 바치십시오.
감동이 식기 전에, 계산기가 작동하기 전에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깨끗해진 몸으로 사제에게 예물을 바쳤듯이, 루카 복음 19장의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체험한 순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구원이 임했다는 증거는 '마음의 평화'보다 '지갑의 열림'으로 먼저 나타났습니다.
헌금은 내 인생의 주인이 '돈'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다는 독립선언문입니다.
우리는 돈을 걷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봉헌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봉헌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거룩한 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하느님께 드릴 감사헌금을 준비하며 내 믿음의 증거를 마련해 봅시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5,12-1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린 나병 환자의 겸손과 믿음을 본다. 그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하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감히 청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의 기도 안에는 겸손한 믿음이 이미 충만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에 응답하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말씀과 동시에 당신의 손길을 내밀어 만지신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드러남을 본다. 신성으로는 말씀으로 치유하시고, 인성으로는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 그 결과, 곧바로 나병이 사라진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분의 손이다. 그 손길로 우리는 창조되었고, 그 손길로 우리는 치유된다.”(Adversus Haereses V, 15,2) 예수님의 손길은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이 지금 여기에 실현되는 사건이다. 오리게네스는 나병 환자를 죄인으로 해석하면서 말한다. “그리스도는 죄의 나병을 치유하시되,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대신다.”(Homiliae in Lucam, Hom. 7)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죄까지도 정화하는 구원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어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고 말했을 때, 이미 절반은 치유된 것이다.”(Sermo 62,1) 겸손한 믿음이 곧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예수님의 손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은총의 주님은 오히려 만지심으로써 그를 깨끗하게 하셨다. 이는 그분이 율법 위에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Hom. in Matth. 25,1)
교회는 이 사건 안에서 성사의 표징을 본다. 죄의 나병을 고쳐주시는 주님의 자비는 특히 고해성사 안에서 드러난다. 교리서 1421항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병자들의 치유를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결합시키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환자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14절) 하신 말씀은, 치유가 단순히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선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죄의 용서 역시 교회 안에서, 사제의 직무를 통해 선포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 길을 제시한다. 나병 환자처럼, 자신의 죄와 상처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고 고백하며, 주님의 의지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 주님의 손길로 깨끗해진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을 향해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김건태 신부님_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한센병으로 불리기 전까지 나병은 불치의 병, 저주의 병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더욱이 전염되는 병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접촉은 엄금되었으며, 나병환자로 판명되는 순간부터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격리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그러니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무너지게 하는 무서운 병,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과 같은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가 치유를 간청하기 위해,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 장면이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제자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는 엎드려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초월하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자의 간절한 마음을 감안하여 그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시며 치유의 은혜를 내리십니다. 나병환자에게 몸이 깨끗하게 되는 육체적 치유 문제는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가 자신을 멀리하는 데도, 이분은 나를 만나 주시고 내 몸에다 손까지 대시니, 이토록 ‘함께하시며’ 내 마음의 깊은 병을 치유해 주시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지금은 이러한 표현 사용하지 않지만 – 절대 사용해서도 안 됐었지만 -, 혹시 미감아(未感兒)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로부터 병이 옮겨지지 않았다는 말이고, 이때의 병은 항상 한센병, 곧 예전의 나병에 국한되어 있었던 터라, 그 의미는 특히 부모에게 비참의 극치를 맛보게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센 박사가 나균을 발견하여 그 치료 방법을 찾아내기까지, 나병은 전염병으로 인식되어 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거의 5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한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대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군복무 또한 무사히 마치고 제대했을 때, 복학까지는 4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본당 신부님이 [수원교구 중고등학교 연합회] 지도를 맡고 계셨는데,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행사를 하나 계획하고 있으니, 대신 맡아 지도하고 준비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행사 수익금 전액은, 방금 말씀드린, 미감아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말씀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여 각 본당 학생회를 방문하며 준비에 들어갔고, 수원 시민회관에서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으며, 입장료와 찬조금 등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내친김에 용문 본당 관할 ‘음성나환자 정착촌(=상록촌)’을 방문하여 기금을 직접 전달하라 하셔서, 학생회 간부들과 그 마을을 방문했고, 전달식을 마치고 곧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구성원들이 바라는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고서, 학생회 간부들을 먼저 보내고, 저는 하룻밤을 지내며 교리교육과 친교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도 각자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허락을 받고, 바로 그 ‘미감아들’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맙고 기특한 일이었습니다. 조금 늦은 시간에 마련된 친교의 시간, 음주와 함께 노래자랑 시간이 돌아왔을 때, 제 또래의 젊은이가 다가와서 제게 소름 끼치는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내게는 당신이 예수요!” 함께하려는 마음을 조금 표현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병도 병이지만 나병환자들이 정말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은 소외이며,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함께함입니다.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가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드러내고, 그들 또한 힘을 내서 함께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희생하는, 복된 한 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2-1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자비’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이 세상을(또는 인간들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상태로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그 일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에덴동산으로
인간들을 다시 데리고 들어가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일의 결과를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는,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사실상 인류 전체입니다.>
스스로, 즉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또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의 불쌍한 처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 라는 말은, ‘처음의 상태로 원상
복구하다.’ 라는 뜻이고, ‘치유’와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32절에,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5,31-32).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죄인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나병’이라는
특정 질병만 생각할 것은 아니고,
또 어떤 병자의 치유 이야기로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2) 병자의 말에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권능’은 확실히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병자의 말은, 주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의향이 있는지는 모른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부족하면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또는 청하지 않아도,
그의 치유와 구원은 주님께서 먼저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이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예수님의 자비’는
인간 세상의 ‘약육강식, 적자생존’과는 정반대쪽에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인간 세상에서는 ‘자신보다 작은 이들’을
낙오자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 낙오자는 희생시켜야 한다는, 또는
스스로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전체주의자들도 많습니다.
물론 착한 사람들이 더 많고,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인간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남들보다 작은
이들’이 살아가기에는 무척 힘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이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그치신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스스로 작은 이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도움을 주는 나’와 ‘도움을 받는 너’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작은 이’일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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