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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10일 수원 교구청 넷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6-01-10 조회수57 추천수1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세례자 요한의 존재와 사명

 

요한 복음저자가 전하는 오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살림이나 애논 등 이 이야기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이 정확하게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를 알 수 없으나, 본문도 언급하고 있듯이,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주님 오심과, 나아가 주님이 세우실 하느님 나라 건설 준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문제는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의 세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데서 비롯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분위기로 보아, 요한이 제자들에게 당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어조로 정리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의 쏠림 현상에 대하여 제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요한의 제자들의 이러한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명 수행 초기부터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스승으로 등장하는(요한 1,35)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닌지 자문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루카 3,15). 제자들에게 단식과 기도를 가르쳤으며(마르 2,18; 루카 5,33; 11,1), 그의 힘찬 목소리는 전 유다 지방을, 특별히 당대의 지배 세력을 뒤흔들었습니다(마태 14,5; 마르 6,20; 루카 3,19).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회개의 표시로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라고 독려합니다(마르 1,4-5).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랑도 헛된 것이라고 소리 높이기까지 합니다(마태 3,8-9).

 

스승 요한의 권위에 찬 말씀과 몸짓에 탄복한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사도 18,25; 19,2 참조), 이들과 초대교회 공동체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2,18).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증언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오늘, 예수님의 명성과 쏠림에 이의를 제기한 제자들에게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소개하며,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하는 존재’로 천명함과 아울러,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고백 속에 요한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다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정의와 겸손의 인물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내일 주님 세례 축일), 본격적인 복음전파 사명에 뛰어드십니다. 요한이 예고했던 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인들을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구원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하루, 요한하면 떠오르는 정의의 목소리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의 자세로, 이웃에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이끄는 가운데, 가톨릭 신앙인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드러내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제목 <주님 공현 대축일 후<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1.1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8.30)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3,22-30)의 제목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유다 땅에서 함께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가고 있다고 말하자,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7-30)

 

이 땅에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들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나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도구로서, 자신의 신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원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 앞에서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다가 그의 칼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친구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신랑이신 예수님은 한없이 커져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 주위에 겸손과 비움의 덕을 지닌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신의 성소(신원.Identity)에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충실한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들'이 많아져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천국)가 되게 합시다!

 

(~ 에스6,3)

 

이병우 루카 신부

 

 

 

조욱현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고백을 중심으로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요한은 자신이 단순한 전달자, 선구자, 준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28절) 그는 자기 자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빛이 아니라고 고백하며, 오히려 빛을 증거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참된 겸손이야말로 인간이 설 자리를 지켜 준다.”(Tractatus in Ioannem, 14,5)

 

요한은 “사람은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27절) 한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도, 제자들이 따르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요한은 인간의 질투심을 초월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무언가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나고 있음을 본 것이다.”(Homilia in Ioannem, 30,1)라고 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소개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이제 자신은 기뻐하며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신부’로 바라보았다. 오리게네스는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친구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마다 그 기쁨에 참여한다.”(Commentarium in Ioannem, VI,29) 교회는 이 이미지를 발전시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신부)의 일치를 ‘구원의 신비’로 해석했습니다.(에페 5,25-32)

 

요한의 마지막 고백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명을 다한 기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참된 겸손의 표현이다. 성 베다 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커져 갈수록 인간의 그림자는 작아진다. 그러나 그 빛 안에서 작아지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In Evangelium Ioannis Expositio, III,30)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을 가르친다.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에게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자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명은 다할 때 물러날 줄 아는 기쁨의 겸손이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 이 말은 우리 삶의 지침이다. 나의 자리, 나의 명예, 나의 성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시도록 내어드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이다. 요한 세례자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낳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1)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ㄴ-23).”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의

 

일차 목표는 ‘나 자신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실격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께서 구원해 주지

 

않으시면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2)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세례자 요한에게도 적용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구원받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을까? 아닙니다. “나도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라는 말은, 원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뜻인데,

 

“인간이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존재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포함시켜서 한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임무 수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든지 수도자든지 누구든지 간에,

 

구원받기로 확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직자들의 직무 수행의 일차 목표는 ‘자신의 구원’입니다.

 

남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직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과 자만심은 누구에게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3)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라는 말에서,

 

‘신부’는 ‘모든 신앙인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그리고 ‘신랑 친구’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요한이 자신은 ‘신부’가 아닌 것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 표현은 자신의 임무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주님의 구원 사업에서는 세례자 요한도 ‘신부’에 포함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이 말은, 자신의 직무를 설명한 말이고,

 

‘순결한 처녀’ 라는 말에는 바오로 사도 자신도 포함됩니다.

 

 

 

4)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은,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때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물러나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그 주인공이 등장하면 퇴장하게 됩니다.

 

이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지만, 이 말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 완수를

 

나타낸 말이고,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라.” 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드러내고 예수님을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명강사’ 라고 소문난 사람들이

 

사람들의 인기에 취해서 그렇게 변해갑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ㄱ).”>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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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전삼용 신부님_서론: 3초의 승부, 그리고 예수님의 "기다려라"

 

유튜브와 릴스에는 '3초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3초 안에 뇌를 자극하지 못하면 엄지손가락은 가차 없이 화면을 밀어 올립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죄악시하며 끊임없이 '도파민 샤워'를 즐깁니다. 이런 시대에 "강론 좀 짧고 재밌게 해주세요"라는 요청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의 풍경은 이 성공 방정식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빨리 나가서 홍보해라"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라고 명하십니다. 도파민은 '지금 당장'을 외치지만, 성령의 역사는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1. 멈춤의 미학: 성녀 소화 데레사의 역설

 

왜 멈춰야 할까요? '성녀 소화 데레사의 역설'이 그 답을 줍니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15세에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 24세에 선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담장 밖으로 선교를 나간 적이 없는 '집순이'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평생 지구 반 바퀴를 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나란히 그녀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선교는 발로 뛰는 마일리지 싸움이 아니라, 사랑의 밀도를 높이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펌프질을 해야 손발이 움직이듯, 그녀가 골방에서 바친 기도의 심장이 전 세계 선교사라는 손발을 뛰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제자들을 묶어두신 이유도 같습니다. 기도의 심장이 먼저 뛰지 않으면 선교의 손발은 금세 지쳐 떨어집니다.

 

2. 성령의 접속: 바벨탑의 교만을 넘고 시나이의 칼을 거두다

 

제자들이 '한마음(Homothymadon)'으로 기도하며 그릇을 준비하자 오순절에 성령이 폭발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현상을 술주정이 아닌 하느님의 역사라 선포합니다.

 

이 사건은 구약의 두 가지 비극을 완벽하게 역전시킵니다. 첫째, 인간이 하늘에 닿으려다 언어가 찢어진 '바벨탑 사건'과 달리,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오시니(성령 강림) 갈라진 언어가 하나로 통했습니다. 둘째,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우상 숭배로 '삼천 명'이 칼에 맞아 죽었으나(탈출 32장), 베드로가 성령을 받아 설교하자 회개하여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살아났습니다(사도 2장). 율법은 죄인을 죽였지만, 성령은 죄인을 살립니다.

 

3. 공동체가 면역력이다: 로제토의 기적

 

도파민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소개한 '로제토의 기적'이 힌트가 됩니다. 1950년대 미국 로제토 마을 사람들은 술, 담배, 기름진 음식을 즐겼음에도 심장병 사망률이 기적적으로 낮았습니다. 비결은 좋은 유전자도 건강식도 아닌 '끈끈한 공동체'였습니다. 3대가 함께 살고, 저녁마다 식탁에서 수다를 떨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 연결감이 죽음도 피해 가는 면역력이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정교한 교리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면역력 때문이었습니다.

 

4. 영혼을 울리는 소리: 영화 '미션'

 

우리의 선교는 논쟁이 아닌 '아름다움'이어야 합니다. 영화 '미션'의 명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1750년 남미의 정글, 가브리엘 신부는 무장한 원주민들 앞에 총 대신 오보에를 꺼냅니다. 창끝이 목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순간, 울려 퍼지는 '가브리엘의 오보에' 선율. 그 아름다운 소리에 살기 등등하던 전사들의 눈빛이 풀리고 창이 스르르 내려갑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영혼을 울리는 진심, 그것이 바로 성령의 언어입니다.

 

결론: 뿌리 깊은 나무처럼

 

씨를 뿌리고 4년 동안 고작 3cm 자라지만, 5년째에 폭발적으로 자라 숲을 이루는 '모소 대나무'처럼 조급해하지 맙시다. 산테지디오 공동체의 시작이 거창한 전략이 아닌 작은 기도 모임과 가난한 이와의 우정이었듯, 선교는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유창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모습에 감동합니다. "보아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올 때, 3초의 자극에 지친 세상은 비로소 우리 안의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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