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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 신앙의 보증수표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07:44 조회수43 추천수0 반대(0) 신고

 

신앙과 믿음은 병립가능할까요? 또한 신앙과 믿음은 서로 어떤 관계로 병존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일까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이 질문에 개신교 때부터 많이 생각해왔던 질문 중 하나입니다. 완전한 답을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잘 모르거나 또 안다고 해도 막연하게 알고 또 실제 정확한 차이를 알려고도 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표현이 있죠. 철이든다. 이건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자각하는 걸 의미합니다. 제가 방금 스스로 자각한다고 했을 때 국어적으로는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스스로를 넣은 것은 이때 강조의 의도로 저는 중의적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마치 역전앞과 같습니다. 물론 이게 결국은 자신이 어떤 결과물을 얻기는 하지만 그 결과물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믿음에도 철이 든다고 할 때처럼 철이 들까요? 만약 철이 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철이 들까요? 묵주기도를 많이 하면 들까요? 아니면 미사를 많이 참례하면 들까요? 기도를 많이 하면 철이 들까요? 많은 봉사를 하면 철이 들까요? 아닙니다. 이런 것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냥 단순히 맹목적으로 맹신적으로만 하는 신앙생활만으로는 전혀 믿음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건 흔히 우리가 잘못 오류를 범하는 신앙생활의 일부 중 하나입니다. 그저 시간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1년 신앙생활한 사람과 10년 신앙생활한 사람과 30년 신앙생활한 사람과 신앙과 믿음의 정도를 자신 개인에게 적용했을 때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변화가 없다면 그건 달리 말하면 헛신앙을 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일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변화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결과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비근한 표현을 한다면 맨날 꼴찌를 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현상을 두고 말할 때 사용한다면 이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럼 이와 같은 현상이 믿음생활에도 있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론적으로는 있어서는 안 되는데 실제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이때 '신앙'이라는 게 어떤 의미로 '신앙'인지 이것에 대한 정확한 자기만의 정립된 의식이나 사고가 없이 그저 남이 가니 장따라 가는 것처럼 단순 반복적인 형태인 기계적인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밖에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형태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불행한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본인 자신은 자각을 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건 마치 자신의 몸에 독버섯처럼 암세포가 성장하고 있는데도 그게 암세포인지 모르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게 암세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그땐 이미 늦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나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제 사례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금 나의 신앙과 믿음이 건강한지 한번 체크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육신의 건강과 질병에 대해서는 건강검진을 많이 해도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대해 건강검진과 같은 검진을 하며 체크를 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사실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과 지표가 있어서 만약 해보게 된다면 지금 심각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겁니다. 심각한 병에 걸려 있어도 이게 지금 중병인지도 모르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실제 육신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심각성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혼이 병들어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데도 죽어가는 걸 모르고 지난다는 사실을 만약 자신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이 되겠습니까? 실제 이런 게 자신에게 일어나도 모른다면 그 또한 얼마나 충격적이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지금 영혼의 상태가 이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도 해당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도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보증해 주는 확실한 보증수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건강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실한 보증수표를 가지려고 하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그걸 가지려고 노력을 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게 병행이 되지 않으면 마치 중환자가 중환자인지도 모르고 병원을 다니면 병이 나을 줄 알고 다니는 환자가 바로 우리 일반 신자와 같은 개념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확 정신이 번쩍 들 것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신앙생활을 해도 그냥 단순히 깊이 뭔가 생각하고 고뇌하며 다니지 않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고뇌를 하는 것을 불행한 신앙생활과 또 흔히 표현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고통과도 같지만 영혼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내 영혼을 건강하게 지키는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이 났을 때 그 병이 치유되는 과정에서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진통 같은 것 말입니다. 여자가 생명을 잉태해 해산의 진통이라는 그 고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처럼 그런 것만 있기를 바라며 가는 신앙은 그게 아주 건강하고 평온한 신앙처럼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 그런 신앙은 아주 위태로운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일부러 어떤 고통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애써 병을 굳이 초대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하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정말 자신의 신앙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또 고뇌하지 않고 그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신앙생활만 한다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영혼이 병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육신은 건강하지 않아도 영혼은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어떤 걸 선택하실 것인가요? 

 

저는 굳이 선택을 한다면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육신의 삶은 유한한 삶이지만 영혼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는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행동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을 하며 살고는 있지는 않는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런 주제로 묵상글을 올리느냐 하면 저는 나이는 얼마 먹지 않고 그렇게 인생을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 신앙인들을 보면 이런 고민을 하며 신앙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에 한번 화두를 던져본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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