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월 16일 수원 교구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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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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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6:23 | 조회수54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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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와 용서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해 본 적은 없어도,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몇몇 지명은 그래도 우리에게 친숙한 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일 것입니다. 유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유다교 회당과 (내일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관이 있었던 걸로 보면, 예수님 시대에는 잘 알려진, 제법 규모가 컸던 마을로 추정됩니다.
이 마을에서 예수님은 오늘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치유 기적에 앞서 예수님은 여전히 가르치심으로,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가르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 현실적으로는 육체적 병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아온 중풍 병자가 치유의 대상이기는 하나, 이미 또 다른 영역의 치유를 겨냥하는 듯합니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풍 병자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사정을 살펴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걸을 수 없는 상태의 이 병자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고, 병자의 고통에 가엾은 마음으로 늘 함께했던 이웃들은 흔쾌히 그를 들것으로 옮겨 예수님 계신 곳까지 당도하기는 했으나, “많이 모여든 사람들”이라는 장애물 앞에 또 한 번 난감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서 방법을 찾아냅니다.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내려보내는” 진풍경을 연출합니다. 열성이 아니라 극성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간절한 마음 이상으로, 바로 그 선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으로 치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증거이며 보증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는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입니다.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현세적 상선벌악 사상, 곧 현세에서 이미 선(善)에는 상(償), 악(惡)에는 벌(罰)이 뒤따른다는 사상에 젖어 있던 유다인들, 그 가운데서도 율법 학자들은 현세의 병을 포함한 모든 불행 요소들을 죄의 결과로 받아들였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따라서 병의 치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바로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이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과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치유가 육체적인 치유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치유가 주어진다고 하더라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영적인 치유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 기적 앞에 모든 이가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율법 학자들만 측은하게 보일 뿐입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복음 전파 활동 내내 반대와 적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 나라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 속의 중풍 병자처럼 이웃의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임 없이 도움을 청하는 용기, 이웃이 도움을 청할 때 주저함 없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겠다.’는 일념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삶을 다짐하며, 모두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체험하고 이 나라를 널리 알리는 가운데, 즐겁고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삼용 신부님_세상이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당신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아주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의 반응, 즉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움'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가끔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도대체 쟤는 뭐지?"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묘한 두려움을 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굶어 죽어가는 아사 감방에서 들려온 것은 저주가 아니라 기도 소리였습니다. 나치 간수는 훗날 증언했습니다. "그 신부가 나를 쳐다볼 때, 나는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맑고 위엄 있는 눈빛이 무서웠다." 총을 든 군인이 굶어 죽어가는 신부의 눈빛을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이 '품격'이 주는 공포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두려움, 특히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용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차원이 다른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루마불' 같은 보드게임을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이들은 장난감 지폐 몇 장을 잃으면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그 게임 안에서는 그 종잇조각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곁에서 보는 아버지는 웃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진짜 돈이 들어있는 '실제 통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게임 머니는 그저 놀이 도구일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진짜 통장'을 쥐여주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목숨, 돈, 명예라는 '게임 머니'가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잃을까 봐 벌벌 떱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이 세상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보드게임이구나. 나에게는 죽음도 앗아가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Zoe)이 이미 내 안에 있구나." 이 '진짜 생명'을 맛본 사람은 '가짜 생명(생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시선과 위협으로부터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게임 머니)을 빼앗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진짜 통장)이 건재함을 아셨기에 피식 웃으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안에서 죽음이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나가는 '문'으로 바뀝니다. 마치 딱딱한 껍질 속의 씨앗이 껍질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껍질이 깨져야(죽음) 비로소 싹이 트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으로 확 들어올 때, 우리는 세상을 경악하게 만드는 '경외감'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생명의 배짱'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이 법정은 명확합니다. 빌라도는 '죽일 권한(게임의 룰)'을 가진 판사고, 예수님은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피고인입니다. 세상의 공식대로라면 예수님은 울며 매달려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법정의 공기는 기이하게 흐릅니다. 칼을 찬 빌라도는 안절부절못하며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합니다. 반면 묶여 있는 예수님은 태산처럼 고요합니다. 화가 난 빌라도가 소리칩니다. "나에게 말을 안 할 셈이냐?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때 예수님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게 대답하십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그대는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다." 이 순간, 빌라도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낍니다. 빌라도는 고작 예수님의 '육신의 껍질'을 깰 수 있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그 너머의 생명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세상의 권력은 무력해집니다. 이 거룩한 생명력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집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피 감옥에 갇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발에는 무거운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곳에서 들려야 할 소리는 신음이나 원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그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비명이 아니라 찬미가가 울려 퍼집니다. 간수는 이 비상식적인 평화에 압도당합니다.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을 때,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자결하려 합니다. 그때 바오로가 외칩니다. "우리는 여기 있다. 스스로 해치지 마라!" 간수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칼을 든 채 맨손의 죄수 앞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떱니다. "선생님들,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이 주는 고통보다 내 안의 생명력이 더 클 때, 세상의 폭력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쿠오 바디스』에 나오는 원형 경기장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사자들이 달려드는데도 서로 손을 잡고 평온하게 찬미가를 부르는 신자들을 보며, 피를 보고 싶어 했던 로마 관중들은 침묵에 빠졌고 나중에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세상은 나를 보고 '뭐지?'라고 반응하는가, 아니면 '너도 똑같구나'라고 반응하는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그 '자유인'을 경외하게 됩니다. 부디 이번 한 주간, 세상의 예상과 반대로 가십시오. 성령께서 주신 진짜 생명을 믿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며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한 집에 계시자 사람들이 문 앞까지 가득 모여들었다. 군중이 가득 차 있던 그 집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나 이 사건의 중심은 단순한 병의 치유가 아니라 죄의 용서이다.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자, 지붕을 뜯고 그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의 기도와 신앙생활 안에도 수많은 잡념과 세속적 분주함이 군중처럼 몰려와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붕을 벗겨내는 용기”, 곧 말씀을 향한 집요한 열정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치유보다 먼저 선포된 것은 용서이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항의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가 드러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겨나고, 치유도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Enarrationes in Psalmos, Ps. 41) 죄는 인간의 내적인 중풍과 같아서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깊은 곳까지 들어와 용서하시고 고쳐 주신다. 또한 이 기적은 개인적 신앙의 결실이라기보다 공동체적 믿음의 열매이다. 병자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되었다. 우리 신앙도 그렇다. 부모, 친구, 교회의 전통,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한다.
오늘 우리는 서로의 신앙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장애물을 벗겨 주어야 합니다. 즉, 기도와 희생으로, 격려와 사랑으로 다른 이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각자가 수행해야 할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는 “군중 같은” 잡념들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 이끌림을 받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가? 오늘 나는 내 이웃을 위해 어떤 ‘지붕을 벗겨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일으켜 새 삶을 살도록 하시는 참된 치유자이시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제목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1.16)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
'대박의 원천이신 주님!'
오늘 복음(마르2,1-12)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어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들것에 달아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ㄴ.11)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은 대박의 원천이십니다. 예수님과 손잡고 걸어가면 대박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배제된, 자기 자신 안에(자기의 생각과 틀에)만 갇혀 있으면 힘들어집니다. 때문에 대박의 원천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모두를 위해 전부를 내어 놓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내어 놓으신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새로운 소임지를 향해 떠납니다. 어제 숙소에 이삿짐을 옮겨 놓았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의 손을 잡고 떠납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보다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그래야 새로운 소임지에서도 대박이 날 것 같습니다. ㅎ
2004년 6월 28일, 늦은 41살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고, 22년째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저에게 대박(?)의 은총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예수님처럼 하려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박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길 빕니다♡
(~ 1마카1,32)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12)”
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중풍 병자’도 아니고,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입니다.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간절하게 믿고 청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만 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자동응답기’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평생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하는 불치병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지만, 주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2코린 12,9).
바오로 사도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닙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강했던 사도입니다.
그러면 그의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치유와 건강 회복을 바라는 심정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큰 병을 앓았던 사람이라면 잘 압니다.
코린토 2서를 보면,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의 간청을
거절하신 것은, “바오로 사도의 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강함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사실 그것은 바오로 사도 자신의 깨달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든 “믿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병자에게 가서 “믿음이 부족하다. 간절함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라고 꾸짖는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 없는’ 잔인한 일입니다.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이 큰 병에 걸린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가
어리석었고, 경솔했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2) 한 가지 더, 병자에게 하면 안 되는 말은,
“이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니...” 같은 말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긴 하지만, 그 섭리를 깨닫는 것은 병자 자신이
할 일이고, 하느님의 뜻이고 섭리라고,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라고, 옆에서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병고를 견디고, 극복하고,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병장수를 누리는 것만 ‘하느님의 복’인 것은 아닙니다.
성인 성녀들 가운데 평생 건강하게 살면서
장수를 누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고 ‘죄의 용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병자 자신이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거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이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그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그의 믿음과 회개를 보시고” 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 즉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4)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군중에게 막힌 상황은,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를 가로막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붕에 낸 구멍을 통해서 예수님 앞으로 가야만
했던 병자는 병이 나은 뒤에는
‘군중 사이를 지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던 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군중이 처음부터 조금씩만 옆으로 비켜 주었으면,
지붕에 구멍을 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밖에 있는 사람도, 내가 잘 모르는
사람도 모두 사랑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인류 전체가 공동체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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