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생활묵상 : 두 사람이 죽어 하느님 앞에 갔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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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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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1-22 | 조회수47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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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 이유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하고 또 다양한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소설이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는 걸 알고도 읽는다는 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부부도 아님에도 부부라 생각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가상인데도 허구인데도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구이고 가상이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간접체험 같은 걸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냥 어떤 관념적인 이야기는 실제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가 많기 때문에 제가 실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이 속에서 우리가 신앙의 한 면을 진지하게 곰곰이 묵상하며 중요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서 함께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핵심 주제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의 판단기준이 있다면 과연 그게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신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마치 상황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같은 느낌입니다. 두 남자가 길을 함께 가는데 앞에 왠 비구니 스님이 쓰러져 있습니다. 실제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 이 두 남자는 개신교 신자로 설정하겠습니다. 그럼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 같네요. 아마도 상황은 이해되시겠죠. 문제는 한 사람은 보니 비구니 스님인 걸 알고 이거 부처를 믿는 사람이네 하고 마치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이고 해서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명 만약 크리스챤이었다면 분명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줬을 게 분명한 사람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상황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다른 남자는 일단 위험한 상황에 있음을 직감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근데 보니 비구니 스님입니다. 순간 갈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처를 믿는사람이잖아 하고 말입니다. 한낱 불상 같은 걸 숭상하는 우상숭배하는 사람처럼 생각을 해 무시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생명은 중요한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도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줘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구호조치를 취해 비구니 스님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날 그 주위에 자연재난이 있어서 그만 두사람은 죽게 되었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외면한 사람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오히려 그게 예수님을 절실히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 남자는 은근 약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좋은 일인데 이게 그 사람은 예수님도 믿지 않는 비구니 스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상황은 다 설명을 했습니다. 만약 이런 가상의 설정 속에서 물론 가상입니다만 누가 그럼 과연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일까요? 이게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걸 자주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답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비구니 스님을 구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뻔한 이야기를 제가 언급했을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서 이 뻔한 단순 사례를 통해 다시 한 번 더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 자녀인지 그걸 다시 한번 상기하자는 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가장 큰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 본질이 무엇이며 그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았다고만 해서 예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례는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의 상징입니다. 만약 세례로 다 결정이 된다면 세례 이후의 어떤 행위나 그 행동의 가치가 그 속에 묻혀서 판단이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할 하등의 필요성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로 모든 신분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신분이 고정이 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을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을 하면 이 세상 그 어떤 신심행위를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자녀가 아닌 사생아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무심코 생각하고 우리가 평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우리는 지금 나는 하느님을 따르는 자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묵상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은 자신있게라고는 말씀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형식상 겉으로만 자녀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주 일부분만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걸 오늘 새벽에 묵상 체험글을 올리느냐 하면 최근 제 주위에 우리가 이걸 잘못 알아서 어떤 한 부부가 상처를 받아 다른 공동체로 떠날 위기에 처한 현실을 보며 제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한번 진심으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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