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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근 신부님과 수원 교구청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09:45 조회수54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영근 신부님_*오늘의 말씀(1/23) :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독서 : 1사무 24, 3-21

* 복음 : 마르 3, 13-19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 <오늘의 강론>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원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가까이’라는 말은 [교회법](573조 1항)에서 ‘축성생활자’를 지칭할 때, 표현한 말마디입니다. 곧 “축성생활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성소는 이토록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사랑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께 나아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어떻게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김건태 신부님_열두 사도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행적이 본격적인 복음전파 사업의 서론에 해당한다면, 이제부터 본론에 들어갑니다. 그 첫 작업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심’입니다.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부르심의 목적은 우선,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심’입니다. 다른 공관(共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 곁에는 늘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늘 곁에 두시어,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듣게 하고, 당신의 행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본 것을 전하며, 지상 교회를 맡아 구원사업을 이어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 양성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최대 역점 사업이 제자 양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음,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심’입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보게 하신 것은, 있는 그대로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파견이 전제되는 대목입니다. ‘파견하다’라는 동사는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의 소명과 사명을 기술할 때 사용되던 용어였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소명과 사명에 적용되는 용어입니다. 사도는 그리스어로 아포스톨로스인데, 이는 ‘파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파생된 표현으로서, ‘파견된 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복음, 곧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들보다 먼저 파견되신 분은, 성부로부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들의 파견 목적은 따라서 하느님의 지고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구현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심’입니다. 이 권한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구마(驅魔) 행위로 국한할 수도 있으나, 문맥상 넓은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존재, 그분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걷도록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사도들에게 이 권한을 주셨다 함은, 성자께서 세우시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야 할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자격을 말합니다. 특히 전례와 성사 집전을 통해서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마귀적인 요소들이 자리 잡을 수 없도록 늘 깨어 지켜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여 부르신 사도들은 출신과 성격과 직업이 매우 다양한, 얼핏 보기에 우리와 별반 큰 차이가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당신 교회의 큰 기둥으로 키워내셨다는 사실 앞에서, 스승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펼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이 바로 제자 양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키워 하느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신앙인, 나아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일꾼으로 만들어나가시리라는 믿음으로, 힘찬 하루 펼쳐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분 곁에 두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순히 가르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고, 그분의 삶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이는 교회가 ‘공생과 파견’이라는 두 축 위에 세워진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분의 말씀에 흠뻑 젖어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란 스승의 말씀 속에 잠겨, 그분과 하나 되는 사람이다.”(De Doctrina Christiana, 4.10.16) 즉, 참된 제자가 되려면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스승과의 친밀한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는 삶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어부, 세관원, 혁명가 등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과 말씀을 체험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며 복음을 전했다. 이는 교회가 각계각층을 포용하는 보편적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또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시몬→베드로, 사울→바오로, 레위→마태오) 그들의 신분과 정체성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상징한다. 우리 신앙인도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으면,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삶과 정체성 전체가 변화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참된 제자는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주님의 친구이며,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여정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성 바실리우스는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참된 제자의 삶이다.”(Regulae fusius tractatae, 12) 즉, 예수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에서 오는 은총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가? 그분의 친구로서,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가?”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쳐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 우리 모두 주님과 친밀한 삶을 나누며, 그분을 닮는 참된 제자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송영진 신부님_<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은, ‘힘’을(권능을) 주신 일이기도 하고, ‘책임’과 ‘임무’를 맡기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의 권한과 힘을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임무 수행을 하라고 ‘위임’해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권한과 힘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에만 그 위력이 발휘되는 것,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권한과 힘이라고 착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마르 9,18),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그랬을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 외에도 원래 사도 직무는 전부 다, 또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들은 전부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6-8ㄱ).”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2) 내 안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먼저 ‘내 안에’ 복음이 가득 들어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가득 차면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2장).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성령 강림’이 사도들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도들 안에 복음이 가득 차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을 남에게 전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으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신앙을 증언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지도 못하고, 남을 믿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사랑 가득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처음 보셨을 때 바로 칭찬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을, 우리 교회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예외적으로 바르톨로메오 사도만 칭찬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들은 각자 어떤 특별하고 뛰어난 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사도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둘을 뽑으셨습니다(루카 6,13). 우리는 사도들의 평범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비범함과 특별함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자기 자신의 내면에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나만의 특별함’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나 겸손 같은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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