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월 24일 수원 교구청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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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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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1-24 | 조회수61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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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예수님의 주변 사람들
오늘 복음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에 앞서, 용어 하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친척들’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hoi par’ autou는 직역하면 ‘그분에게서 오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족들’ 또는 ‘친척들’ 외에 ‘친구들’ 또는 ‘추종자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혈연관계를 넘어 예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 아니면 혈연관계를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먼 친척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는 친척임을 내세우면서도, 부정적 평가에는 ‘나 몰라라’ 하거나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아’ 제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부연하자면, 이 장, 곧 마르 3장의 끄트머리에 언급되는 “예수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5) 하신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참 가족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인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다음 주 화요일 복음 말씀 참조).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그대로 수용하여 구세주를 이 세상에 낳으셨을 뿐만 아니라, 한 생을 아드님과 함께한 성모 마리아가 이 참 가족의 으뜸가는 구성원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의 길에 들어선 이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하여 바리사이들, 그 가운데서도 핵심 세력인 율법 학자들은 줄곧 이의 제기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던 반면, 군중들은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행적 앞에서 감탄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사명 수행 초기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신을 거부하는 자들과 당신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자들 사이에 서 계십니다. 혈연이나 지연 또는 학연 관계 등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 수행이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짐에 따라, 참 가족 구성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모여드는” 군중과,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러 나서는” 지인들의 모습이 그렇게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이 마음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드러내야 하는 일,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표현해나가야 하는 일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타산적인 신앙생활을 털어버리고 우리 삶의 의미가 오로지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이 걸어가신 길 위에 있음을 다시금 고백하며, 신앙인으로 힘차게 달려 나가는, 값진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3,20-21: 예수님 친척들의 몰이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나 친지들이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오히려 가까운 이들로부터 오해와 거절을 경험할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이 미쳤다.”(21절)는 말을 들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조차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마르 6,1-6; 요한 7,5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건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셨으나, 가까운 이들에게는 거절당하셨다. 이는 빛이 어둠에 비추었으나, 어둠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9)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시지만, 오히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더 깊은 오해와 거절을 당하신다. 이는 우리도 감수해야 할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교회는 다툼이 아니라 친교와 화해의 집”임을 강조한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약한 이에게 힘이 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도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어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갈라 6,2)고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나 혼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주는 상호보완적 사랑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마태 5,44). 이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 감정을 넘어 성령의 은총 안에서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하는 삶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승리는 원수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18,4)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장점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심하거나 상처를 주기보다, 참을성과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친척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삶에서 오해와 거절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참된 제자의 길을 배운다.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사랑과 이해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시는데, 나는?>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1)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는 미쳤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그분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나섰다.”입니다.
‘미쳤다.’ 라는 말을, 20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뒤의 22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0절에 연결하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는 생활”을 하시는,
즉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예수는 미쳤다.” 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일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하셨다는 말에서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
없다. 안식일이라 해도...”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작업을 마치신 다음에는, 그 일에
대해서는 쉬셨지만,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일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하신다는 것이
구약시대 때부터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쉬지 않고 일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2) ‘예수님의 일’은, 사람들을(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나를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들과 허무한 일들 때문에
시간을(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물론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이들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신앙생활보다 취미생활을 더 중시하면서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26-30.32).”
3) ‘미쳤다.’를, 바로 뒤의 22절에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미쳤다.’는, ‘마귀 들렸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는 마귀 들렸다.”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또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라고 믿는 것이 당연한데,
율법학자들은 그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논리가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억지 논리’였고,
그 ‘억지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예수는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4)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마귀들 편에 서 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들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탄의 전술일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아마도, “내 편에 서지 않아도 된다.
예수 편에만 서지 마라.” 라고 인간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사탄의 종교라고 비방하는 자들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 편에 서게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예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마르 3,29).
‘몰랐다.’ 라는 변명은, 심판 때에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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