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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근 신부님_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6-01-25 조회수82 추천수5 반대(0) 신고

* 오늘의 말씀(1/25) : 연중 제3주일

* 제1독서 : 이사 8, 23ㄷ-9,3

* 제2독서 : 1코린 1, 10-13. 17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오늘의 강론> 마태 4, 2-17(연중 3 주일)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신 7년째 되는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가치를 선포하기 위한 것”(자의교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2019.9.30.)이라고 이 날을 제정하신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오늘 우리도 '말씀의 가치'를 깊이 되새겨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선포가 말재주로가 아닌 복음화 된 삶의 증거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에서 복음 선포의 첫 발을 내딛으십니다. 그리고 이는 <제1독서>에서 예고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마태 4,14)이었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니, 이 사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사명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선포되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곳이 많은 이방인들이 출입하는 곳이어서, 복음이 그들을 타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도,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렇게 “어둠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습니다.”(마태 4,16 참조)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해도, 더 큰 불의와 부정이 난무합니다.

궁핍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갈라져 있고, 자신의 이기와 탐욕을 채우는 시대가 되어 있는지요!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셨는데도, 어째서 사람들에게는 불평만 늘어갈까요?

우리의 필요를 좀 줄여서 가난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요?

그 어디서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대체, 이러한 어둠과 질곡과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빛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것은 “가까이 와 있는 선사된 하늘나라”를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회개”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곧 빛을 받아들이는 데는 삶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옛 습관을 그대로 둔 채 하늘나라를 맞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늘나라”가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첫 제자가 된 어부들처럼, 단지 습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도, 아버지와 가족도 내려놓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놓아야 하고, 시대를 비껴가야 하고, 남들에게 배척받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이 지녀온 믿음과 사랑과 희망마저도,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내려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버리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빛과 생명을 맞아들이는 데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지 않는다면, 버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겠지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그 분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회개’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방편인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선사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자연스런 결과인게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의 첫 제자들처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라고 하시는 것이지, 단지 당신에 대한 숭배자나 지지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곧 당신을 “삶으로 따르는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숭배하는 사람”“따르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숭배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떨어져서 마치 극장에서처럼, 차분히 앉아 자신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전례를 거행하면서, 감실 앞에서 머무르면서, 혹은 복음 앞에서, 그렇게 숭배하고 예배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반면에, “따르는 사람”은 따르는 그 대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처럼, 말재주가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는 일겠지요.

사실, 보통 때는 “따르는 사람”“숭배하는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상황이 되면, “숭배자”는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버리지만, “따르는 이”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노고와 자신을 바칩니다. 19세기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자기부정과 자기포기의 요구,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요구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 위험이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갈라놓는다.”

“우리는 '따르는 사람'일까요? '숭배하는 사람'일까요?”

주님, 위험과 도전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시는 주님!

저희가 지지하는 단순한 숭배자가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말씀으로 삶을 전향하는 회개를 일으키소서.

당신의 말씀과 사랑이 저희 삶 안에서 피어오르는 향기가 되고, 당신의 영광이 되소서. 아멘.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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