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2월 4일 수원 교구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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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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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04 | 조회수7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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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하느님의 소외!'
오늘 복음(마르6,1-6)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활동인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그래서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하느님께서 나셨는데도 기뻐하고 환영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또 하나의 이상한 역설은 하느님과 메시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역설이며, 참으로 이상한 하느님의 소외'입니다. 이러한 역설과 소외는 지금 여기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온전하게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나의 허물을 통해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것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 안에만 갇혀 있었고, 보이는 것만 믿었습니다.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요 구원자이신 하느님으로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모두의 구원, 우리의 구원, 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 우리를 위해 땀을 흘리시고 수난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도록 합시다!
(~1마카7,26)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겪으신 놀라운 역설을 보게 된다. 군중은 처음에 그분의 지혜와 권능에 놀라워했으나, 곧 다섯 가지 의문을 던지며(2-3절)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4절)고 말씀하시며,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워하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단지 동네의 평범한 목수였을 뿐이다. 그들은 겉모습과 과거의 인연으로만 판단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드러내신 구원의 신비를 보지 못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가 그리스도의 겸손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하여 넘어졌다.”(Sermo 183,1). 겸손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외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된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고 기록한다.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의 응답이 필요하다. 교리서도 이를 이렇게 가르친다. “기적은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행위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548항 참조). 즉, 불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우리 안에도 작은 나자렛이 있다. 우리는 이웃을 외모나 과거의 모습으로 쉽게 판단한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은총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이미 정해진 틀 속에 가두려 한다. 이처럼 “나는 저 사람을 안다.”는 자기 확신이 오히려 믿음을 가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권고한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새롭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익숙하다고 여기면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게 된다.”(Hom. in Ez. 1,7,8). 우리가 복음과 성사, 그리고 이웃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늘 새롭게 받아들이려면, 겸손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주님도 기적을 이루실 수 없지만, 작은 믿음이라도 주님께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신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보겠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겠느냐?” 우리 안의 불신과 편견을 내려놓고, 이웃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며, 믿음으로 주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 삶 안에서도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아멘.
김건태 신부님_내가 아는 사람이 맞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다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정으로, 나자렛을 방문하게 되며, 그곳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주님탄생예고 기념성당과 바로 뒤편에 자리한 성 요셉/성가정 기념성당에 이어, 정말 작지만 의미 있는 (유다교) 회당 기념경당을 방문합니다. 나자렛에서 유일했던 유다교 회당터에 세워진 경당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회당의 규모로 보아, 예수님 시대의 나자렛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실 나자렛은 구약성경은 물론 초기 유다교 문헌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일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물었겠습니까! 작은 마을이었으니, 분명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포함한 고향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마르 3,20-35 참조). 어떻게 보면, 오늘 예수님은, 공생활에 접어드시기 전, 삼십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했던 고향 사람들, 어렸을 때부터 당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의 오해와 오판을 불식시켜 회개로 이끌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고향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늘 해오신 대로,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실” 정도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로 시작해서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그의 형제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의문들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는 결론으로 이끕니다. 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까? 우리 마을 출신 가운데, 저렇게 언변이 탁월하고 지혜가 출중하고 놀라운 행적까지 펼치는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오판이었고 패착이었습니다. 쏟아내는 일련의 질문들이 오히려 잘 알고 있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외적으로는 몰라도 내적으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운명을 살았던 예언자들이 다시 언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사제양성에 힘써오던 터에, 출신 사제들 가운데 본당에서 또는 특수 사목 분야에서 예상외로 이름을 떨치는(?) 분들 소식을 들으면서, ‘신학생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신학생 시절의 그 신부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사제가 된 후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신부님들의 신학생 시절 생각하면, 그저 죄송하고 고맙고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내 생각과 의식과 판단에 스며들 때까지 되풀이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 토해내는 말들이 상대방의 마음에 비수가 되는 일만을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꼭 그러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을까?>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1-6).”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집안’만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가장 낮은 곳으로
보내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직업이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달랐을 것입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에 연결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주님의 힘은 왜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날까?
그리고 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메시아의 표징일까?
인간의 상식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ㄴ-28).”
2) 가지고 있던 권력과 재산과 지위와 신분 등을 모두 잃고,
인간 세상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찾게 되고,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글을 남긴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경험을 해야만
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도와 묵상
중에 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떻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셨다.” 라는 깨달음과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이유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산만 생각하면서,
또 인간 세상에서의 자신의 높은 지위와 신분 등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왜 ‘메시아의 표징’이 되는지,
또 메시아께서 왜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가난한 목수가 되셨는지, 그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예수님을 안 믿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은, “메시아는 로마 황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통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생각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보다 더 강한 통치자의 모습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또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일만 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4)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모두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기심과 탐욕만 가득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보아도 사랑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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