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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삼용 신부님_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이유: 절대 나를 믿지 마십시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6-02-05 조회수143 추천수6 반대(0) 신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둘씩 보내셨을까요?

단순히 외롭지 말라는 배려였을까요? 아니면 혼자 보내면 가다가 나무 그늘에서 낮잠이나 자고

농땡이 피울까 봐 서로 감시하라고 붙여주신 걸까요? 

 

아니면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본당에서 구역장님이나 단체장님들이 봉사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하소연이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일이 힘든 건 참겠는데요, 저 자매님이랑 같이 일하는 건 죽어도 못 하겠어요.

차라리 저 혼자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게 낫지, 저 형제님이랑은 천국도 같이 가기 싫습니다."

예수님이 짝지어 주신 그 동료가 내 성질을 긁어놓는 '원수'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굳이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가장 약하고, 혼자 있을 때 가장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똑똑하고 강하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 혼자를 선택했다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보십시오.

1934년, 에베레스트 단독 등반을 시도했던 영국인 모리스 윌슨(Maurice Wilson)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신력과 기도만 있다면 장비나 셰르파의 도움 없이도 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맹신했습니다.

주변의 만류를 비웃으며 홀로 설산으로 들어간 그는, 결국 1년 뒤 찢어진 텐트 속에서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장의 마지막 줄은 "또다시, 끔찍한 날이다"였습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의 실제 주인공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는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는 위선적인 사회가 싫어 모든 것을 버리고 알래스카의 야생으로 떠납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자연 속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리겠다고 자신했습니다.

가족의 연락도 끊고 지도조차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자연 속에서 그는 굶주림과 고독에 시달리다 버려진 버스 안에서 쓸쓸히 죽어갑니다.

그가 죽기 직전 책 귀퉁이에 남긴 마지막 메모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처절한 후회였습니다.

"행복은, 오직 나눌 때만 실재한다(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 

 

영화 '127 시간'의 주인공 아론 랄스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자르고 탈출한 뒤,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위에 갇힌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내 오만함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탄은 무조건 우리를 혼자 떼어놓으려 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도 그렇습니다.

그가 전장에서 부하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할 때는 성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하들을 전장에 보내고 혼자 왕궁 옥상을 거닐 때, 긴장이 풀리고 '보는 눈'이 사라진 그 순간 욕망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전장에서 칼을 들고 적군과 싸울 때는 빈틈이 없던 다윗이, 혼자 뒷짐 지고 거닐 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공동체라는 방패가 사라지자, 욕망이라는 화살이 심장에 꽂힌 것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사탄에게는 축제요, 우리에게는 지옥의 입구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고독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가 사막으로 간 이유는 마귀와 맞짱(?)을 뜨러 간 게 아닙니다.

도시의 화려함과 유혹 앞에서는 자신이 무력함을 알았기에, 유혹의 대상이 없는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유혹 앞에서 "한번 버텨보지 뭐, 내 믿음이 얼만데" 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입니다.

진정한 용사는 유혹의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는 겁쟁이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이렌의 유혹(욕망)을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에게 "나를 돛대에 꽁꽁 묶어라. 내가 풀어달라고 소리쳐도 절대 풀어주지 마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믿은 게 아니라, 자신을 구속해 줄 '밧줄'을 믿었습니다.

"나는 안 넘어가"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넘어갑니다.

묶이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혼자서 자신의 욕망을 이겨낼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룩한 밧줄'이 되어주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그 밧줄이 나를 귀찮게 하고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속이 나를 유혹의 바다에 빠지지 않게 붙들어 줍니다. 

 

봉쇄 수도원의 높은 담장은 수녀님들을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센 욕망의 파도가 밀려들지 못하게 막아주는 방파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방파제를 쌓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라는 담장, '계명'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안전합니다. 

 

16세기 로마의 사도 필립보 네리 성인은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 필립보를 잘 감시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이 녀석이 또 당신을 배반할지 모릅니다!"

성인조차 자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서 괜찮아"라는 말은 가장 위험한 헛소리입니다.

오늘, 내 옆에 앉은 배우자가 잔소리를 합니까? 감사하십시오.

그 잔소리가 나를 죄에서 지켜주는 사이렌 소리입니다.

본당의 까칠한 형제자매가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그들이 바로 나를 묶어주어 천국까지 안전하게 데려갈 오디세우스의 밧줄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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