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2월 6일 수원교구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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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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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06 | 조회수92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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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세례자 요한의 운명
오늘 복음에서는 끔찍한 사건 이야기 하나가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는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예외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는 말씀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는 하나,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생생하게, 마치 목격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할 정도로 세례자 요한의 권위와 존재는 대단했으며, 아울러 그의 죽음의 충격 또한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헤로데는, 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우리에게 친숙한 대(大)헤로데(기원전 37년-4년)가 아니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를 말하며, 그의 (이복)동생은 필리포스였고 그의 아내는 헤로디아, 딸은 살로메였습니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로 헤로데를 여러 차례 강력하게 비난함에 따라, 헤로디아의 앙심은 쌓여만 갔습니다. 살로메로 추정되는 춤은 춘 소녀 역시 동생의 딸, 곧 질녀였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헤로데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경비병을 보내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또 다른 인물이 쉽게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법정에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대사제들에 의해 선동된 유다인 군중 앞에서 정작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고 하지만(마태 27,24),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수용한 빌라도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요한의 등장과 함께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오리라는 예언자 엘리야의 귀환이 실현되었다면,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대로 예시한,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가 보여주었던 모습, 하느님 나라의 건설 도구인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박해하는 못난 행위는 나와 상관없는 모습들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악의보다는 무기력, 이기심, 비열한 침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느냐가 신앙인다운 모습의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조금만이라도 나를 희생하여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세례자 요한의 죽음”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준다. 예언자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삶이었고, 동시에 세상의 권력과 죄악 앞에서 고통과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삶이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불안에 사로잡혔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이는 그의 내면에 깊은 죄책감이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는 순간적으로 쾌락과 안락을 좇지만, 그 뒤에는 양심의 칼날이 남아 늘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죄인은 어디서든,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In Psalmum 140, 14). 죄를 덮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것은 더욱 자신을 붙잡고 파괴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잘못을 두려움 없이 지적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예언자는 권력자에게 아첨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진리의 대가로 요한은 목숨을 내어주었다. 교회는 늘 이러한 예언자적 증언 위에 살아왔다. 교리서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진리와 선을 증언해야 하며, 이를 위해 박해를 당할 수도 있다.”(교리서 2471항).
헤로데의 약점은 권력이 아니라 욕정과 허영이었다. 그는 춤추는 소녀 앞에서 경솔한 맹세를 하고, 결국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빼앗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헤로데는 다른 이들을 다스릴 권세를 가졌으나, 자기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했다.”(Hom. in Matth. 48,3).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기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넘어뜨린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나는 혹시 헤로데처럼 죄를 덮고 합리화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요한 세례자처럼 불의와 죄 앞에 예언자적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예언자의 삶은 단지 설교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모두 진리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작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거짓보다 진실을 선택하며,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할 때, 우리는 요한 세례자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요한 세례자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진리 목소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을 준비하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그는 우리에게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증인으로 남아 있다. 우리도 오늘의 세상 속에서 진리를 증거하는 작은 예언자가 되도록 기도하자.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우시고, 우리 안에 성령의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시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2.6)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죄를 짓고는 못 산다!'
오늘 복음(마르6,14-29)의 제목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입니다.
오늘은 '일본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곧 '나가사키에서 장엄하게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리신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26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회 회원이셨던 성 바오로 미키는 십자나무 위에서 죽어가면서 이렇게 장엄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그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성무일도 제2독서 중)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은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처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처럼,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처럼 오히려 칼 앞에서 당당합니다. 박해와 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많이 힘든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약함이 많은 나 자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쁜 마음인 악은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마카7,50)
송영진 신부님_<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방관하는 사람도 공범입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마르 6,17-21).”
1) 헤로데 영주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단순히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대중적인
인기’가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당시 임금이었던
헤로데 왕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은 셈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언자였는데도,
정치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은, 헤로데 영주의
권력이 그만큼 허약한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하수인이었을 뿐이고,
백성의 지지도 못 받고 있었고, 늘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2)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할 때, 막연하게 ‘회개하여라.’
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꾸짖었고, 삶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라고
꾸짖었고, 일반인들을 향해서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라고 타일렀습니다.
또 세리들을 향해서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 라고 말했고, 군인들을 향해서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꾸짖은 일도,
권력층 사람들을 꾸짖은 일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없지만,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만 꾸짖은 것이
아니라, ‘헤로디아’도 직접 꾸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라는 말은,
요한이 헤로디아를 직접 꾸짖었음을 암시합니다.>
3)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해 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적당한 때’에 요한을 죽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면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래서 헤로디아의
경솔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20절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다.” 라는 말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성급하게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론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경청하는 척 했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언자의 말을 경청하는 척 하면, 백성의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면 요한을 석방했을
텐데, 감옥에 가두어 둔 채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는
것은 듣는 척만 한 것이고, 그것은 ‘위선’입니다.>
4) “좋은 기회가 왔다.”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놓은 일에 대해서 백성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했던 것 같고,
고관들과 유지들이 보는 앞에서 요한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는 ‘고관들과 무관들과
유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갈릴래아 지역의 ‘기득권층’ 사람들이었고,
독재자 헤로데의 추종자들, 또는 동조자들이었습니다.
원래 독재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독재를 하게 됩니다.
독재를 방관하는 사람들도 추종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이 헤로데의 살인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모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저지른 살인죄의 공범들입니다.
<백성들도 대부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들도 공범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예언자가 살해당한 일을,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모두 진심으로 한 일이 아니라,
형식적인 일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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