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2월 10일 수원 교구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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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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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10 | 조회수73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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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상들의 전통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벌이신 논쟁 장면 하나를 소개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자주 논쟁을 벌이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바리사이들은 유다교의 기록 전승인 ‘모세의 율법’은 물론 구전 전승을 가리키는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했던 사람들로서, 이 두 전승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구원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바로 구원의 절대적 요소인 의(義)를 쌓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따라서 죄인들과의 접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 시대에 흔히 ‘라삐’(스승)라 불리던 율법 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에 속했던 사람들로서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본디 율법 학자들은 서기관들로서 국가의 각종 문서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후에는 율법을 보존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오경을 집대성한, 유다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즈라’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규정에 관한 것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사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위생상의 권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무더울 뿐만 아니라 먼지가 많은 지방에서, 그것도 음식을 섭취할 때 손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손 씻음은 절대적인 권고 사항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절차가 하나의 규정으로 성문화될 때는, 이를 경시하는 경향이 팽배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규정을 ‘사람의 전통’으로 단정하신 다음, 사람의 전통에서 비롯된 더 심각한 문제로 넘어가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예수님은 그 한 예로 하느님의 법(神法)인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 ‘부모 효도’ 문제를 꺼내십니다. 부모께 대한 효도는 마땅히 공양으로부터 시작해야 함에도, 효도에 필요한 공양물을 ‘코르반’(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으로 바치겠다 선언하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아도 된다.” 하는, 곧 공양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규정을 고발하십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규정’입니다.
하느님이 내리셨다는 의미에서의 ‘신법’하면 두려움부터 가질 수도 있으나, 그 신법이라는 십계명 안으로 들어가면, 두려워할 것도, 놀랄 것도, 특별히 연구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윤리적이고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1-3계명은 비신자들에게 신적인 요소로 각인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계명들입니다. 십계명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코르반 전통’은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비인간적인 전통이기에 없애버려야 하며,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권고 정도로 충분하지, 굳이 규정으로 만들어 인간을 속박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정말 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일 복음 말씀을 통해서 밝혀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 준수는 그 계명에 내 마음이 온전히 실려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준수해야 할 계명 또는 규정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터득할 수 있을 때,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동반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계명과 규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은 세상과 인류 구원에 있음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의 뜻 구현을 위해 힘쓰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조금 더 기도하고 희생할 것을 다짐하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는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두고 비난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며,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여기서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나 관습이 아니라, 마음과 진실한 사랑임을 가르치신다. 형식과 전통만을 따르는 신앙은 겉치레에 불과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코르반 서약은 인간의 전통이 어떻게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모를 공양해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라는 명분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외형적 규범에 얽매여 마음을 잃은 신앙을 강하게 경고하신다.
이것은 인간 전통과 하느님 계명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인간의 전통은 신앙생활을 돕는 수단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부들도 이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진정한 신앙은 외형적 의식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와 사랑에서 비롯된다.”(Confessiones, IV,8) 가르쳤다.
성 바오로 역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규범과 법을 지켜도 아무 소용이 없다.”(1코린 13,1-3) 하였다. 교회의 가르침도 이를 뒷받침한다. 교리서 2052항은 “하느님께 대한 참된 경배는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과 경외에서 비롯되며, 외적인 의식은 이를 돕는 수단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외형적인 신앙이나 관습에 치우쳐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교회의 법과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 속에 담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진정한 신앙인은 외적인 관습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돌보며,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신앙을 형식과 관습에서 본질과 사랑으로 전환해 나가자. 외적 규범이 아닌,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신앙이 되도록 하자.
“주님, 저의 마음을 깨끗이 하시어, 외적인 형식보다 참된 사랑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제 삶 속에서 당신의 뜻이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아멘.”
이병우 신부님_"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ㄷ)
'우리의 본질과 초심이신 예수님(십자가)!'
오늘 복음(마르7,1-13)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7,6ㄴ-9)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를 따라가는 이들, 완전한 하느님의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나약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이 위선이 예수님을 가장 분노케 했습니다.(마태23,1-36 참조)
위선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입니다.
위선은 '초심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위선은 '따라가야 할 본질을 생각과 말로만 따라가고 행동으로는 따라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위선은 '죄'입니다.
'신앙생활의 참모습'은 '끊임없이 본질과 초심을 바라보고, 본질과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노력'입니다. 이 노력이 바로 '회개'이고,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는 두 부류, 곧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만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본질과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성체(미사)를 받아 모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말씀)하고,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기도)를 합니다.
끊임없이 본질과 초심이신 예수님(십자가)께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마카9,4)
송영진 신부님_<혼자 있는 시간에도 거룩한 사람이 진짜로 거룩한 사람.>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1)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위선은 두 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깨끗하게) 보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것.
인간의 전통과 관습만 잘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는 것.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5-28).”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은 ‘눈에 보이는 모습’이고, ‘속’은 ‘실제 삶’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또는 보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거룩하게 행동하는데,
혼자 있을 때에는, 또는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것, 그것이 위선입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아는 사람도 없는데,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2) 위선자는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자인데, 대부분의 경우에 자기 자신도 속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위선이 무서운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 자신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모르니까 고치지 않고,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너는 위선자다.”
라고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을 때, 그들이 회개하기는커녕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모르고 있다는 것 자체도 죄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들도 다른 사람의 위선을
비판하는 일을 잘합니다.
위선자가 위선자를 비판하는 상황에서, 제3자 입장에서는
누가 진짜 위선자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위선을 꾸짖는 일은 주님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의 위선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된 것을 찾아서 고치고 바로잡는 것뿐입니다.
3)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워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합니다.
진짜로 거룩한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도
거룩함을 유지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면
모든 것이 흐트러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4) 예수님께서 ‘사람의 전통’을 꾸짖으신 일은,
전통 자체를 꾸짖으신 일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지키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안 지키는 것을 꾸짖으신 일입니다.
전통 가운데에는 분명히 ‘좋은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없애야 할 나쁜 전통과 관습들도 많이 있습니다.
<전통을 ‘습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습관이라도 안 좋은 것이라면
빨리 버려야 합니다.
작은 습관이라도 계속 반복하면 ‘큰 죄’가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일들이 더 위험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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