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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 1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6-02-21 조회수286 추천수5 반대(0)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고통을 줄여준 커다란 발명이 4가지 있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폐렴, 상처 감염, 산욕열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일, 수술을 받는 일 자체가 생명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1928,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인류는 처음으로 세균 앞에서 무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항생제는 단순한 약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의 책임이 가능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1991년 유행성 출혈열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항생제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18세기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했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질병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만 있지 않고,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돌보는 사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백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취제가 없던 시대의 수술은 치료이기 전에 형벌과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술보다 고통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19세기 중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의학은 처음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치료는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마취제는 말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신다. 고통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덜어야 할 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저도 2012년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척추 마취를 통해 큰 고통 없이 수술을 마쳤고, 이렇게 잘 걸어 다닙니다. 1895,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X선을 통해 인간의 몸속을 처음으로 보게 했습니다. 이후 CTMRI는 보이지 않던 병을 드러내고, 조용히 진행되던 죽음을 살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신앙적으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생제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게 했고 백신은 공동체를 보호하게 했으며 마취제는 고통을 줄이려는 연민을 가르쳤고 영상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는 책임을 일깨웠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분명한 한 줄로 요약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영원한 생명이 왔습니다. 아담의 죄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자신을 떼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에는 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함께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역사 안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편안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그 유혹은 세 가지였습니다.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이는 배고픔 앞에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먼저 선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는 십자가 없는 영광, 책임 없는 권세의 유혹이었습니다.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이는 하느님을 이용하거나,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절하며 쉽게 목적을 이루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기적이나 힘으로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순종이 죽음을 넘어 생명을 여는 길임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유혹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더 조용하고, 더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아.” 이 말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존엄을 부정하는 열등감의 유혹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는 사실보다, 남과 비교하는 기준이 더 커질 때, 우리는 이미 유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작은 거짓, 작은 편법, 작은 타협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늘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수가 한다고 해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유혹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죄를 평범한 일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말이 있습니다. “다음에 하면 되지.” 기도도, 고해성사도, 화해도, 결단도 미루게 만드는 게으름의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를 단번에 넘어뜨리지는 않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듭니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마음은 점점 굳어 갑니다. 이 유혹들은 우리를 크게 흔들지 않습니다. 대신 조금씩, 조용히,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아담은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놓았고,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드셨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매일 유혹 앞에 섭니다. 그때마다 무엇을 붙들 것인지가 우리의 길을 결정합니다. 말씀을 내려놓으면 죽음의 방향으로 가고, 말씀을 붙들면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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