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 21일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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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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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21 | 조회수72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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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5,27ㄴ-32)은 '죄인인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큰 잔치를 베풀고,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 잔치에 함께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3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32)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죄인들도 구원의 잔치에로 들어가게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분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고, 삶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됩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우리도 합시다! 그래서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고 살도록 합시다!
오늘 독서(이사58,9ㄷ-14)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이사58,9-11ㄱ)
주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다. 레위는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존재였다. 그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동족을 착취하던 자였다. 그러나 주님의 한 말씀, “나를 따라라.”(27절)는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초대는 단순히 직업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 전체를 주님께 바치라는 부르심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한 말씀은 바다를 가르는 벼락과 같았다. 레위의 마음은 더 이상 세상 재물에 붙잡혀 있지 않고, 주님의 시선에 사로잡혔다.” (In Matthaeum homiliae 30,2) 곧,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내적 속박을 풀고, 새로운 자유로 초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레위는 곧장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는 단순한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은총의 잔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곧 교회의 모상이다. 거기에는 과거 죄인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임재로 그들은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Sermo 99,3) 즉, 주님과 함께하는 식탁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치유와 화해,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총의 자리이다. 교회의 성체성사 또한 바로 이 은총의 연속이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말한 것처럼 “불멸의 약”(Epistula ad Ephesios, 20,2)으로서, 우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 모습을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한다. “병자가 의사에게 나아오듯, 죄인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병자임을 모른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12) 곧, 주님은 죄인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참된 치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교만한 자는 자신의 덕에 만족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닫아버린다.
우리는 다른 이를 쉽게 정죄하거나 배척하기보다, 주님처럼 품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도 레위가 경험한 은총과 기쁨의 잔치가 열리게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그분의 부르심은 과거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은총이다. 우리도 레위처럼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회개와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 또한 성체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잔치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치유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며,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다. 아멘.
김건태 신부님_죄인을 부르시는 주님
오늘 우리는 레위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공관복음인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도 등장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엔 소명 대상이 레위로 불리는 반면, 마태오 복음서엔 마태오라는 이름이 나오며, 나아가 그가 죄인으로 취급되던 세리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르코나 루카가, 사도로서 흠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진술하기를 피하려 했던 ‘세리로서의 마태오’를, 마태오 본인만이 부족했던 자신의 모습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고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마태오는 온 마음으로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신 분”임을 힘차게 선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라”하는 전격적인 부르심에,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투명하게 부르시는 예수님과 이 부르심에 명료하게 응답하는 레위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받는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르시는 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부르심 당시의 레위는 거룩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걸맞지 않은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치하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모든 세금은 로마제국으로 흘러 들어갔기에,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유다인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착복이나 횡령 등으로 어느 직업보다도 비리의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는 이의 제기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절차였습니다.
율법 준수에 매여 있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치유를 간절히 바라던 ‘병든 이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바리사이들을 ‘의인’으로 보고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분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다.’는 원칙을 감안한다면,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다.’는 대원칙을 전제로 한다면, 문제는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의사이신 예수님이 정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을 ‘병든 이’곧 ‘죄인’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이’ 곧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가르침과 이끄심 덕분에 영육 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봉사하는, 뜻깊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ㄴ-32)”
1) 하느님은, 죄인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마태오복음 18장과 루카복음 15장에 있는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ㄹ-1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2-2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만 만나셔야 한다. 저 사람들은 만나시면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일’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잃은 양’ 하나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만,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양은,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배반자 유다도 ‘잃은 양’이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이 되었고,
결국 멸망을 향해서 갔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 뉘우침이
회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마태 27,3-5).
유다의 뉘우침은 그냥 ‘후회’입니다.
아마도 지옥은,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죄인들과
자기 죄를 뉘우치긴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다.”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과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4)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특별히 더
점검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자기의 내면에 숨어 있는 ‘위선’입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항상 주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거나......
말로는 “나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회개하는 척 하는 것과
진짜 회개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나는 진짜로 ‘밀’인가?”
“아니면 밀처럼 보이는 ‘가라지’인가?”
위선과 교만과 자만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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