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전삼용 신부님_칭찬 받음보다 비난 받음이 이득인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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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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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21 | 조회수160 | 추천수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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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첫 토요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며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왜 건강검진을 잘 안 받을까요? 겉으로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주 고약한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병원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제일 잘 알지, 의사가 뭘 알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착각합니다. 무엇보다 싫은 건, 병원 가서 제 치부를 드러내고 의사에게 "술 끊으세요, 살 빼세요" 하는 잔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의사의 지시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그 오만한 마음, 즉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은 그 교만이 저를 병원 문턱에서 돌려세웁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지, 꾸중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혹은 성당에 나오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번듯해진 다음에 주님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레위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가 봐도 죄인이었고,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숨길 가면조차 없는 절박한 상태에서 자신을 치유해 줄 단 한 분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바로 레위가 가졌던 '솔직한 겸손함'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죄인이었기에, 거룩한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거룩함을 증명하느라 주님의 자비가 들어갈 틈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다 보면, 결국 나 자신조차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당에 나와서도 내 상처를 내놓는 게 아니라, 내 거룩함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병원에 와서 내시경을 받는 대신 복근을 자랑하는 환자가 되는 꼴입니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먼저 나를 죄인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 자신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곤 합니다. 가면이 완전히 찢겨나가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정직해지는 것이지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거룩했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9세기 프랑스의 왕이었던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의 이야기입니다. 833년, 그는 정적들과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수아송(Soissons)의 성 메다르도 수도원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주교들은 그에게 만천하에 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루이는 수많은 군중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려한 왕의 예복을 벗어 던져야 했습니다.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위선을 하나하나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아송의 치욕'이라 부르지만, 영성적으로는 '수아송의 부활'이라 부릅니다. 루이는 온 나라가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하자, 더 이상 '위대한 왕'이라는 가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그의 가면을 벗겨버리자, 그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정직한 단 한 명의 죄인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솔직함이 그를 지옥 같은 절망에서 끌어올려 하느님의 자비를 붙들게 만든 것입니다. 레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죄인이라 불렀기에, 그는 오히려 자유롭게 예수님의 청진기 앞에 심장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이 파격적인 통찰은 교회가 이미 깨끗해진 사람들의 전시장(Casta)이 아니라, 창녀와 같은 죄인(Meretrix)들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순결해지는 중'인 병원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당은 이미 치유된 사람이 자신을 뽐내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을 존중하는 길은 내가 아플 때, 혹은 아프지 않더라도 내 영혼의 숨은 병명을 찾아내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눕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등장하는 '위스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생아를 둔 술꾼이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해를 들어주다 잡힙니다. 처형 전날 그는 감옥 바닥에서 절망합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께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갑니다." 그는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독한 죄의 통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천하에 죄를 드러내는 겸손함이야말로 주님의 자비를 가장 선명하게 듣는 청진기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닙니다. 고해성사하듯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칭찬해주는 '마약'에 취해 삽니다. 그 달콤한 칭찬은 우리 영혼의 암세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이 마약에서 깨어나려면, 나를 비난하고 나의 허물을 지적하는 타인을 '나의 죄를 알려주는 고마운 스승'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스페인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역시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Pati et contemni pro te."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받고 멸시받게 하소서.) 왜 성인은 이런 당혹스러운 청을 드렸을까요? 타인의 멸시가 내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을 부수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수술 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우리를 부풀게 하지만, 멸시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사막 교부들의 일화집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아바 모세(Abba Moses the Black)의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날 수사들이 그를 시험하려 "저 검둥이 죄인 출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모욕했습니다. 회의 후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 덕분에, 나는 내 영혼이 그보다 훨씬 더 시커멓다는 진실을 떠올렸소. 그들은 내 영혼의 때를 벗겨주는 고마운 비누들이오."
마지막으로 성 요한 클리마코(St. Joannes Climacus)의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그대들의 잘못을 꾸짖고 허물을 드러내는 자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십시오. 그들의 혀는 그대들의 영혼에 묻은 교만의 비계를 도려내는 의사의 수술 칼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다이어트 끝내고 검진받겠다는 영적 교만을 버립시다. 타인의 칭찬이라는 마약을 끊고, 나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드러냅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제 안의 병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시고 고쳐주십시오!"
이 정직한 절규가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는 전능한 의사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비참한 환자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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