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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23일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6-02-23 조회수86 추천수3 반대(0) 신고

조욱현 신부님_“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오늘 복음은 사순절에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며 부활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심판의 장면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은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임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가장 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35절). 이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돕는 차원을 넘어선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 안에서 굶주리시며, 네 손 안에서 배불리신다.”(De Nabuthae 12,53) 즉, 우리가 행하는 자비의 행위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말한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금식하지 않았다.’거나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In Matth. Hom. 79,2) 이는 종말의 심판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이웃 사랑의 실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교회 전통도 이를 강조하며, 교리서는 “가난한 이와 고통받는 이를 향한 자비의 행위는 복음의 증거이며, 그것이 없으면 참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2447항) 가르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불”(41절)은 본래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악마와 그를 따르는 세력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벌하기 위하여 지옥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다만 인간이 자기 의지로 그 길을 택할 때, 그 결과로 들어가는 것이다.”(De Civitate Dei XXI,17) 따라서 단죄는 하느님이 원하셔서가 아니라, 사랑을 외면한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다. 

 

사순 시기는 단순히 개인의 영적 수련만이 아니라,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섬기는 훈련의 때이다. 금식과 기도, 자선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이웃 사랑을 구체화할 때 온전히 완성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과 이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랑 안에서만 자신을 발견한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순 제1주간을 시작하며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굶주린 이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있는가? 목마른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가? 

  

우리의 종말은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증거한 사랑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뵙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 부활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낮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마태25,31-46)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이 직접 뽑으신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갈라, 악인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선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예수님의 기준'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느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 

 

때문에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늘 낮은 곳을 바라보고, 늘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 기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시듯이, 그곳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좋을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 대로 사랑하지 말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 방식대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되는 하느님의 심판대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1-46).”

 

 

 

1) 이 말씀은, “심판의 기준은 ‘사랑 실천’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들,

 

즉 신앙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은 사람들과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사랑으로’ 그 믿음을

 

실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여기서 “주님, 저희가 언제...” 라는 말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언제...”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셨습니까? 저희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저희는 곧바로 주님께 먹을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즉 몰라서 못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와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이들’이 곧 나다. 너희는

 

‘작은 이들’에게 사랑 실천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유죄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작은 이들이 왜 주님입니까?

 

작은 이들은 작은 이들일 뿐입니다. 작은 이들이 곧

 

주님이라는 것을 저희는 몰랐습니다.” 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한 번 선고가 내려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심판입니다.

 

몰랐다고 항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작은 이들이 곧 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글자 그대로 ‘주님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에 대해서 아무도 토를 달 수 없고,

 

반박하거나 비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선언’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순종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3) ‘작은 이들’에 관한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이 말씀은, ‘작은 이들’을 외면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신앙인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 혹시라도, “사랑 실천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13,1-3).

 

이 말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이 말에 대해서 또다시 “왜?”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16).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여기서 ‘형제’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첫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자기 사이에 담을 쌓고 ‘사랑 없이’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저쪽 세상에 가면, 이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쪽에서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게

 

될 텐데, 아무도 없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곳에는 예수님도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김건태 신부님_심판의 잣대는 사랑 실천

 

오늘 복음 말씀 앞에 서면, 미켈란젤로 불후의 걸작 ‘최후의 심판’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천상에 들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행동해야 되겠다 다짐을 하면서도, 잘못하면 지하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켈란젤로가 작품 활동을 하던 16세기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랬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마태오 복음 25-25장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마태 24,3)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이 바로 심판의 척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시며,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심판의 참된 일자’를 밝혀주시는 듯합니다.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리라 믿고 있는 이 심판관을, 인간은 오래전부터,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이웃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심판은 바로 이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러니 어떤 심판이라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나가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한 그루의 사랑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삶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이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 잣대가 분명하니만큼, 사랑 실천에만 매진하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 세계의 유머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비롭지만 계산만은 분명한 대감댁에서 일하던 일꾼에게 친구가 셋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마음속 깊이 두고 있는 친구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많은 시간 함께 하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귀찮게 여기는 친구로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 우정을 겨우 유지해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감마님이 계산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 일꾼을 호출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려운 존재였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하다가 세 명의 친구에게 동행을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에게 사정을 말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가니, 그는 대감댁 문 앞까지만 함께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실망한 이 일꾼은 하는 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늘 귀찮게 여기던 이 친구는 동행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대감마님 앞에서 필요하면 증언도 아끼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짐작들 하셨겠지만,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선 우리에게 첫 번째 친구는 재물, 두 번째 친구는 가족, 세 번째 친구는 사랑 실천입니다. 재물은 한 발짝도, 가족은 무덤까지만,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 앞에서 나를 위해 긍정적으로 변호해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내가 바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임이 전제됩니다. 가장 작은 나를 이처럼 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도 당연히 우리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향하고 살피고 도와주는 사순시기 첫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면 더욱 고맙고 신나는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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