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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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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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3-10 | 조회수59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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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형제와의 관계에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치시는 와중에, 베드로가 조용히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형제와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상대방이 말과 행동으로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그를 어디까지 참아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지요. 베드로는 자신이 참아줄 수 있는 최대치를 ‘일곱 번’으로 설정한 듯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 한계치를 세 번 정도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그것도 다른 형제들보다 나아야 할 ‘수제자’이니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일곱 번까지는 참아보려고 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누구나 그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니 ‘왜 일곱 번 밖에 못참느냐’고 그를 나무랄 이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용서는 몇 번까지 참을 수 있는가 하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마음의 문제에 달린 일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베드로의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제한된 횟수를 물을 게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답하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지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상대방을 심판하려는 마음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고, 나를 아프게 만든 형제도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보살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의 처지라는 점입니다. 즉 내 손 안에 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다면 애초에 누리지 못했을 ‘그분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비유 속 무자비한 종이 동료에게 꾸어준 ‘백 데나리온’은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일만 탈렌트’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한 듯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동료가 빌려준 것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단죄할 수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무자비한 종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복된 지위를 박탈당하고 받은 은총들을 토해내는 슬픈 결말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일만 탈렌트’만큼의 은총과 사랑,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음을 항상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받은 은총을 당연하게 여기면 내 마음에 ‘불안’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가득 차게 됩니다. ‘내 것’이라 여기는 것들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남이 나에게 아주 작은 피해나 손해를 끼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 손에 좋은 것들을 아무리 많이 쥐고 있어도 그것이 주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매일을 ‘지옥’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받은 은총은 그분 뜻에 맞게 잘 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 안에만 담아두면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맙니다. 내가 받은 은총을 기쁘게 누릴 ‘선물’로 만들지, 갚아야 할 무거운 ‘빚’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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