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느님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시죠.
작성자이은정 쪽지 캡슐 작성일1999-10-12 조회수2,107 추천수14 반대(0) 신고

정말 가슴이 뛴답니다.  대단하신 분이세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탈선과 힘든 시집생활을 이겨내셔서요.

저도 79년에 -6살- 멋모르고 영세를 했답니다.

 

정말 재미있는 텔레비젼을 보지도 못하게 하고 토요일날 걸어서 30분이나 되는 산동네

성당에 가라고 혼내시고, 억지로 보내는 엄마가 미운적이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성당에 가면 그때 당시 봉헌금을 -거창하네^^’- 100원을 주셨는데, 남동생하고 50원은

사먹고, 50원은 봉헌을 했었죠.

미사를 보다가도 졸리면 화장실 간다고 나와서 마당에서 뛰어 놀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저는 첫영성체까지는 무사히 마쳤지요.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에 큰어머니께서 광주에서 올라 오셨는데, 성당에 아이들을 보내지도

엄마에게도 나가지를 말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그때는 저도 성당에 적응을 잘해서 잘 지내고 있었거든요.

아이들이 크리스마때 새싹들의 잔치라고 해서 발표회도 갖고, 선물도 받고, 여름성경학교도

다니면서 정말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거든요.-그래서 전 크리스마스를 정말 좋아해요.-

 

사실 저희 집안은 종교가 좀 복잡했답니다.

칠성신을 굳게 믿는 토속종교가 저희집안의 종교였는데, 할머니와 아버지만이 유일한

천주교신자셨죠.  아버지는 수도회에 들어 가셨다가 나중에는 나오셨지만요...

 

큰어머니께 집안의 조상신이 내려서 큰어머니는 돌아가실 때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답니다.

여하튼, 어머니는 그말에 저희를 성당에 보내지를 않으셨어요.  

어린 마음에 전 정말 좋았죠.  집에서 놀고, 텔레비젼도 실컷 보고 말이죠..

하지만, 학기초에 생활기록부에 적는 종교란에는 꼭 천주교라고 적었죠.

그리고, 천주교 신자라는 자긍심도 높았구요.  솔직히 개신교를 좀 깔보았죠.

큰어머니를 계기로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성당에 가질 않았어요.

그러다 은행에 취직하고, 제 친구가 은행일에 힘들어 하던 저를 이끌고, 명동성당에 갔답니다.  

성당에 들어 섰을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저의 가슴은 터질듯 했답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어요.

오랜만에 하는 미사기도문과 성가도 정말 제가 얼마나 그리워 했었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답니다.  항상 옆에서 다른길에 앉아 놀던 저를 주님은 지켜 주시며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 믿고 기다려주셨던거죠.

그 친구는 미사보가 없는 제게 자신의  세례때 선물받은 미사보를 주었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성당에서 잃어버렸죠.

하지만,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서 성당에 나가도 주일미사만 참여 할뿐 다른

기타 활동은 전혀 하지를 않았답니다.

 

그러다 93년 10월에 아버지께서 정말 갑자기 돌아가셨죠.

아침에 밥 많이 먹으라고, 챙겨주시던분이 점심때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지셔서 뇌사사아태에

빠졌답니다.  밥새워 아빠 옆에서 기도 했어요. 제발 살려달라고...

하지만 도저히 수술을 할 수 없는 자리라서 산소호흡기를 뺄 수 밖에 없었답니다.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때 화장실에서 울면서 결심했죠.  결혼식장에 나를 데리고갈 아빠가 없어서 전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요..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없었다면, 저희 가족은 너무나 슬프고,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며, 성당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되었답니다.

저는 청년전례부를 하면서 , 제 동생은 청소년 미사에 나가면서말이죠.

하지만 엄마는 공장에서 일하시는라, 시간이 거의 없으셨어요.

 

제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후-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바로 군대에 들어갔답니다.

첫 휴가때 집에와서 엄마한테 ’신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해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요.

남자라고는 그 아이 하나거든요.

반대가 무척 심하셨어요.  하지만 제 동생은 계속 어머니를 설득했고, 저도 찬성이었으므로

설득했죠.  또 대구 이모와 이모부가 많은 힘이 되어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죠.

지금은 재수를 해요.  성적이 조금 모자라서요.  올해도 경쟁율이 5대1이라 걱정이죠.

제 동생의 신학교 입학 희망으로 저희 집아니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답니다.

저희 어머니는 아직도 공장에서 2부제로, 아침조, 밤조로 일하시지만, 그래도 성당에 나가

시려고 노력하시고, 동생을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묵주기도를 바친답니다.

저는 피정을 갔던 수녀회에 입회하기로 정했구요.  그래서 지금은 은행에서도 퇴사하고, 집

에서 시간을 조용히 보낸답니다.

 

이곳 신내동에 이사와서 정말 저희 가족은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솔직히 마포에서 이곳 변두리서울로 오려고 할때, 저와 제동생은 반대를 많이 했죠.

다 쓸어져 가는 무허가 집이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친구도 많고 교통이 좋아서 그냥 있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엄마 공장에서 신내동 아파트에 근로자청약을 넣을 수 있다

해서 사촌오빠의 설득으로 17평짜리 아파트에 들어오게되었답니다.

솔직히 중도금도 많이 모자랐는데, 다행히 제가 입사때 부터 부어오던 적금이 만기가 되고

엄마의 퇴직한 직장동료분께서 선뜻 퇴직금을 빌려 주셔서 무사히 들어 올 수 있었죠.

하느님의 뜻이라면 뜻인 이곳에서 저희 가족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답니다.

저는 미흡하지만, 중고등부교사로, 제동생은 예비신학생으로 활동을 하죠.

엄마도 구역모임에 자주 가시고, 연도를 하러 가시기도 하죠.

 

이모든게 정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정말 힘든 때가 있었어. 라고 말을 할 때 저는 생각하죠.

나는 없었는데,... 그건 주님께서 저희 가족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죠.

지금은 잠시 기도도 많이 줄고, 나태해졌지만, 이 글을 적으면서 다시금 신앙생활에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여러분, 어느곳, 어느때나 주님은 저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되세요.  항상 믿으세요.  신앙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니까요.

 

전 게시판에도 곧잘 글을 올리는데요.  여러분도 함께 하세요.

주님의 평화와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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