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짓 부부행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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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용순 | 작성일2003-05-20 | 조회수1,39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거짓부부행세
포졸대장 김치문은 천주학쟁이로 붙잡혀 온 죄인중에서 신 마리아를 빼돌려 비리버의 아내로 만들어 준다. 비리버는 자기가 찾고있는 아내 데레사를 생각하며 거짓으로 부부행세를 하고 그들에게 술대접을 한 다음 신 마리아를 데리고 공주를 떠나려고 한다. (윤의병신부지음「은화」하권 35-42) wngok@hanmail.net
공주에서 비리버는 포졸들의 주선으로 어느 친구의 문간방 하나를 세 얻어들었고 아궁이에는 옹 솥 하나를 사서 걸어놓았다. 그리고 나니 어떤 친구는 사발, 어떤 친구는 대접, 어떤 친구는 수저, 이렇게 한가지씩 갖다 주고 귀떨어진 소반까지 살림살이가 제법 갖추어졌고 며칠동안 먹을 쌀이며 김치, 짠지며 장물까지 들여왔다. 비리버는 치문이 지시하는 대로 그 날 저녁은 혼자 지어먹고 쓸쓸한 방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까 밖이 왁자지껄하더니 치문과 명보가 앞장서고 포졸 몇 명과 옥사장까지 득의만면(得意滿面)한 얼굴로 젊은 여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온다. 여자는 윗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앉으라는 권고에 못 이겨 외면하고 돌아앉는다. 차림이 초라함은 물론이나 얌전한 여자임에는 틀림없다. 비리버는 겉으로 좋아하는 모양을 지으나 속으로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저 여자도 어느 산골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가 이 악마 같은 놈들의 손에 붙잡혀 오느라 얼마나 놀라고 고생을 하였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다. 전에 자기 내외가 잡혀가던 일이며, 청주 감옥에서 데레사 혼자 여러 포졸에게 성가신 꼴을 당하였던 일이 눈앞에 선하다. 김치문이 한 번 큰기침을 하고 나더니 여자를 향하여 “참, 웬만해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당신 사정도 가긍하고 우리 이성철이 형편도 딱하여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이렇게 빼돌린 것이니 아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둘이 마음붙여 살 도리나 차리시오.” 하고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비리버와 여자가 서로 맞절이나 함으로써 예를 갖추라고 재촉한다. 윗목 벽을 향하고 앉은 여자는 머리를 숙이고 귀밑까지 빨개진다. 아랫목에 앉은 비리버와 윗목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명보가 기다리다 못하여 “얼른 일어나 한번 절하면 되는 것을 왜 기다리고 있어." “이거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공연히 겉으로 점잔빼면 제일인가. 목구멍에서 들여보내라고 재촉이 심한데, 그래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해 우리가 강제로 절을 시켜 주는게 어때?” 비리버가 생각하니 홀홀 단신의 여자가 이런 틈에 끌려와 곤혹을 치르는 것이 가련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다. “아따, 사람들이 며칠 동안 굶었기에 이렇게 다급히 구는 겐가?” 하고 말한 이성철 비리버는 옆에 앉아있는 치문에게로 머리를 돌려 잠깐 수군거렸다. 비리버의 말을 듣고 난 치문은 허허! 웃으면서 좌 중을 향하여 “같이 살면 그게 부부이고, 절을 하느니 예를 갖추느니 하는 것은 겉치레뿐이지 별것 있나. 나중에 잘살고 못사는 것은 자기네들 마음먹기에 달린 게고, 우리는 해줄 대로 해주었으니, 그렇게 거북스럽게 끌 것 없이 우리 술이나 먹 세.” 다른 사람들도 절하는 구경보다 술을 기다렸다는 듯이 죽 둘러앉는다. “아, 절하기 싫거든 술이나 따를 것이지. 그래 본체만체하고 앉았나.” 하고 추근대는 것을 치문이 “여보게, 그 사람은 이제 버젓이 임자가 있는 몸일세. 우리 마음대로 못해.” 하고 껄껄 웃는다. 비리버도 유쾌한 얼굴로 “자, 내가 대신 따라 줌세." 하고 술병을 들어 각 사람에게 듬뿍듬뿍 부어 주었다. 밤이 으슥한 다음 그들은 모두 취해서 비틀거리며 제 집으로 돌아갔다. 떠들썩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방안의 분위기는 이상스럽게 거북하다. 이윽고 비리버가 먼저 말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여보시오, 당신 집은 어디요? 당신도 천주학을 하오?” "………." "아니, 여보시오! 당신이 천주학을 않거든 않는다고 말씀하시오. 그렇다면 관전에 변명을 해야 되지 않겠소?” “나는 천주 성교를 해요.” 여자는 겨우 입을 열어 모기소리만 하게 대답한다. “어디서 살다가 잡혀 왔소?” “천안 대거리에서 살다가 잡혀 왔소!” “그럼, 당신은 장부가 있는 몸이오?” “예 있어요." “같이 잡혀 왔소?” “그이는 달아나고 나만 잡혔어요.” 비리버는 이들 내외도 자기 신세처럼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의 남편도 그러면 자기처럼 아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이 눈앞에 선하다. "그 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지 않소? 그래 당신 이름은 무엇이오?” "………." 비리버가 약간 다가앉더니 은근한 소리로 "나도 사실은 교우요. 천주를 공경하는 사람이오.” 하고 먼저 고백한다. 여자는 이 말을 듣고 비리버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눈만 깜박거릴 뿐, 역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내 본명은 비리버요. 성은 이가이고 사실은 나도 아내가 있소. 내 아내 본명은 데레사요. 우리 동네에 포졸들이 오는 바람에 서로 흩어져 종적을 모르겠기에 소식이나 탐지할까 하고 여기 와서 관노처럼 지내는 중이오. 이건 당신만 아는 사실이니 그런 줄이나 알고 계시오.” 그제야 여자는 안심되는 듯 “예, 저는 신 마리아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닦는다. “고맙소, 참 이런데서 교우끼리 만나서 이야기하게 된 것도 사실 천주의 특별한 안배이신 줄로 알겠소.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하시오.” 이렇게 비리버가 그를 얼마 동안 위로하고 ’잘 때는 방문을 안으로 걸고 자고, 아침에는 일찍 조반을 지어 놓으시오.’ 라고 말하고 나서 자기는 다른 객주 집에서 잤다. 비리버는 이렇게 밥은 이 집에 와서 먹고 잠은 남모르게 객주 집에서 잤다. 나흘째 되던 날, 비리버는 어느 친구에게 돈을 꾸어 가지고 고기와 생선도 사고 술도 받아 가지고 와서 신 마리아에게 저녁에 먹을 술상을 잘 차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서 지난번 그 패들에게 술 한잔 같이 하자고 청하였다. 비리버가 한턱을 내는 셈이다. 그 날 저녁 비리버 방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지난번에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여들었다. 신 마리아도 아무런 거북한 기색도 없이 부부인 양 모든 심부름하는 품이 서툴지 않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며 가장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장 김치문이다. 그는 자기가 주선하여 불쌍한 이성철을 이렇게 살림을 시작하도록 하였고, 또 칼로 목잘려 죽어 넘어질 죄수 여자를 빼돌려 든든한 임자를 얻어 주었으니, 남에게 적선을 베푼 것이라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잔이 돌고 돌아 모두 거나하게 취하였다. 방안에 화기 가득한 중에 저마다 한마디씩 내놓는다. “참, 이제 성철이도 팔자 고쳤어, 마누라 얻고 살림 차리고….” “이제 이만하면 동네 봉로방 신세나 지면서 이리처리 떠돌 필요는 없겠지. 이게 다 치문이 두목의 은혜다.” “참,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치문이 두목과 여러 동간들의 은혜는 내 잊을래야 잊을 수 없소. 이 다음 내 형편이 나아지면 한턱을 더 내기로 하고 오늘 저녁 이 자리로 말하면 약소하지만 인사를 겸해서 한 것에 불과하고, 또 저 사람으로 말하자면 자기 친정에 부모가 아직 생존하여 계시니, 딸이 잡혀온 소식을 들었으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니 한번 가서 찾아뵈어야 하겠네. 그러니 여자를 혼자 가라고 길에 내세울 수 없고 또 나도 한번 가서 상면이라도 해야지. 그대로 이렇게 살수는 없지. 그래서 내일 아침에 떠나서 다녀오겠네. 거기서 한 살림 차려 주면서 붙들면 거기 눌러앉아 살겠지만 그건 바랄 수 없는 일이고…." 치문과 포졸들은 이 말을 옳게 여겨 찬성한다. 비리버가 술병을 들고 한참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따르다가 윗목에 앉아있는 신 마리아를 보고 “여보, 인제 얌전빼서 뭘 하겠소. 이리로 와서 술이나 좀 부으시오!” 신 마리아가 술을 따르는 바람에 술잔은 쉴 줄 모르고 한참 돌았다. 한밤중이 되어 그들은 모두 흠뻑 취하여 비틀비틀하면서 일어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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