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초에 개인적 신앙체험으로 올린 글 (글쓰기 2년전 만남의 때를 회상하며 작성함 = 푸른색 글자) 2005년 4월14일 하느님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시는가/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저서를 읽으면서 살아있는 빛이라는 내용( = 검은색 글자)으로 수녀님 체험글 입니다. 2004년 초, 개인적 신앙체험글로 스스로 작성한 것과 단락을 비교하여 올려 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기도 하고 또한 어려웠습니다. 실존하는 영원성의 자각? 빛의 빛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였으나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신앙체험안에 표현을 빌려 ''인격을 가진 생명 그 자체의 빛, 깊은 곳에서 자신과 연결되어 교류하는 살아 있는 빛'' 을 나눔(증언)하고 싶습니다.
.개인 신앙체험안에 일어나는 일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환상인지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나 이것은 놀라운 일,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분명 현실에 나타난 체험으로서 상상해본 적도 바랜적도 없었기에 더욱 크게 다가온 신앙의 터닝포인트이었습니다. 이제는 고통과 십자가 아래에서도 ''저 너메''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굳게 믿으며 기도드리며 늘 깨어 삶속에서 응답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저 합니다. 기쁜 소식을 성령안에 하나되어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공명하고 싶어 이 글을 적어 봅니다.
2년전(2002년 여름 어느날) 감실 앞에서 영성체 후 고개 숙이고 침묵 기도중에
빛의 빛이라고 할까요? 평생 처음 보는 신비한 빛을 보면서
무어라 할까요? 자각이라고 할까요? 표현이 안되는 체험이었습니다.
불교의 표현의 하나를 빌리자면 ''광명''의 순간이라고 해야할른지요?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체험에서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빛으로 에워
싸였다. 흰빛을 띤, 금색의 빛이 가득 찬 빛의 세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빛나는 광채였으나 그렇게 눈부시지는 않았다. " 영원한 실재의 세계가 실존하는 구나하는 무어라 표현해야 할른지요
보이지 않는 데 있는 것을 체감한다고 해야 할른지요, 아니면
내면에서 실재하시는 실존의 현존 앞에 전율하였다고 해야 할른지요?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체험에서 "궁극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진리에 충만된 상태란 이러한 경지를 말할 것이다. 게다가 그 충만된 빛의 세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영원이다’"
모든 마음과 몸을 바치신 믿음안에 사신분들이 계셨구나.
아! 그래서 순교를 하면서 신앙을 지키신 순교자들, 모든 것을 바치시는
성인들은 현존을 함께 하시어서 죽음마저도 아무 두려움이 없으셨겠다.
그 시간안에 죽음을 넘는 영원한 천상세계가 있구나. 느닷없이 다가온
순간 이었습니다.
지금 죽는다해도 영원성안에 현존하시는, 실재하는 그 무엇이 계시기에 또한
그 차원을 알게 되었으므로 이 보다 더한 얻음은 없겠다. 지금 죽어도 두려움은 없다.
이미 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을 믿는 나는 구하는 것은 이미 다 받았다.하고 그 순간
체험하였습니다. =저의 표현이나 히테코 수녀님의 지복(知福) 표현은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체험에서 "그것은 인격을 가진 생명 그 자체의 빛, 깊은 곳에서 자신과 연결되어 교류하는 살아 있는 빛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지복(知福)이요, 완전한 자유’임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감사와 감격의 눈물과 순간의 깨달음, 감당하기 어려운 영적 슬픈기쁨
(너무나 크신 실재의 실존앞에 경이롭고 환희로운 감사함과 너무 작아지는 나의 존재성와
감히 영원의 실재앞에 서 있는 자신의 비천함을 보는...) 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순간에 경이롭고 환희로운 감사함에 신앙고백이라고
표현해야 할른지 아니면 독백(하느님앞에서 한 개인의 약속)이라고 표현해야
할른지 안하고 못할 만큼의 순간의 벅참,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 늘 깨어 기도하는 사도(하느님의 사명을 알고 실천하며, 복음 선포하는 자)"
가 되겠습니다."
그 시간을 갖게 된후 부터 새벽 미사를 매일 나가게 되었습니다. 혹 못 일어나면
저녁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가톨릭 교육원의 신학과정에서
배우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비가시성의 세계에 내재하는 기쁨의 영,사랑의 영,
자유의 영 체험이었습니다....중략
그런데 체험이 있는 후 늘 늦잠자던 내가 새벽미사를 나가려니
너무 힘들고 그때는 여름철 장마철 인지라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려고 하는데
그당시 저희 본당 신부님이 지금은 성령 지도신부님이 계시었습니다.
어느날 힘들어 중간에 그만 둘까하는 망설임이 마음
한구석에 늘 갈등 중에 있었습니다.
그 무렵 평일 미사 강론중에 신부님께서
마치 저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틈으로 바늘 구멍만한 틈사이로 나오는 빛을
보아도 그렇게 환희롭다. 단 한번의 빛을 보기만 하여도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신앙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등대의 빛처럼 신앙의 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안으로 들어 가면 어떠 하겠습니까?
신부님은 신도에게 영적인 일이 일어나면 기도중에 아신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신부님이 나중에 표현해 주신 말씀처럼 그 빛을 본
그 순간에
매일 감실 앞에 나와 주님께 "늘 깨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하고 독백을 하였답니다.
나중에 묵주기도성월특강(평화방송)에서 강요셉 신부님께서
"평신도로서 "기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 때가 생각이 나며 기뻐 오르는 마음이었습니다.
빛의 빛을 본 이후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날 성당에서 집으로 걸어 오면서 집근처의 풍경을 보고 느낀 감정이
지금도 진하게 기억됩니다.
혼자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날 걸어 가면서 동네의 풍경과 멀리 보이는
남한산성의 아름다움, 하늘의 새벽 구름과 연한 붉은 햇빛등 그날 평생
그런 아름다움이 없는 자연의 극치였습니다. 한동안 동네의 자연이
경이롭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저희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하시는 그 말씀 같았습니다.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체험 글에서그때 저는 논밭이나 벼나 바람이나 수목이나 그 모든 것들, 즉 대우주와의 일체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살아 있는 빛’속에서 체험한 일체감이 제 속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 그 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제 속에서 무엇인가 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을 알았습니다.[...]‘그런 일이었구나. 내가 사후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었다.‘하고 겨우 이해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상의 소유 모든 것을 넘어서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껴왔던 재미있던 느낌, 희열, 성취에서 오는 기쁨을 뛰어 넘은
모든 것을 얻은 느낌 죽음도 두렵지 않는 행복감이라고 할까요?이런
감정이 사람에게도 일어 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 했답니다.
그런데 빛의 빛을 보며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천한 저이기에 강하게
스스로 알수 없는 의식의 세계를 넘어 영원성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하게
되는구나. 그러다 다음의 글을 읽고 더욱 주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영과 영의 은사를 인간적이기
짝이 없는 우리의 변덕스런 기분이나 박약한 의지와 뒤바꿔 버리는 것 이
그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영의 은사를 값싸게 내세워
그것을 기만적으로 미화 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유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가져야 할 깊은 신뢰심을 온갖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순수하게 잘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내는 낮은
목소리, 그 조용한 불빛을 양심의거룩한 법정에서 우리를 고소하는 목소리,
우리를 심판하는 불빛으로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이는 훌륭한 일입니다.
저 목소리, 저 불빛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력하게 있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이
불이 꺼지지 않게 세심히 보존하는 것과 같은 정성으로 우리 안에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세심히 보존하게 해준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저 거룩한 은사를 점점 더 많이 배워 알게 된는데, 그분은 새로운 선물로서
그리고 항상 새롭게 살아 숨쉬는 경이로운 선물로서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그리스도교 안에 살고 계신 영 P.129
침묵의 샘 작성 s.사도요한
이런 표현을 알기까지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며 늘 영적 목마름에 있다가
장황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평화방송을 우연히 켰을때 가르멜 수녀원 원장 수녀님께서
특강을 하시는 데 저에게도 일어난 일에 대한 기도에 대한 강론을 하고 계시어
망설임 끝에 2박 3일 피정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녀님께서 그런 프로그램을 보통 2년간
꾸준히 받은 과정이 필요하시지만 언뜻 직장인을 위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어 만드시었다고 하였습니다.
거둠의 기도란?(수덕의 기도)
하느님 마음에 있다. 골프 공 놓고 집중에서 날린다. 거둠의 기도. 이론을 가지고는 소용이
없다. 삶에서 실천하는 관상기도. 묵상기도란?
"자기가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느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
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다" (천주자비의 글 8,5)
"기도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영혼의 성 중에서)
기도자의 태도: 하느님께 마음을 연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 인내
이런 배움중에 어느 형제분이 불교의 선과 묵상기도와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대로 선을 통한 수행자는 결국 "영원성, 절대자가 계심을 깨닫는 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광명이라고 한답니다. 그러자 저는 문듯 수년, 수십년 그 어렵게 수행하여 광명을
보고 절대자를 알기 까지 그토록 어렵게 시간과 허무와 고독을 넘는 노력이 왜 필요할까?
제가 아는 천주교의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영원성에 대한 자각을 선물로 주시는 데...
이런 말을 하자 모두 웃었습니다.
그 이후의 저에게 일어난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영적 일기를 잘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식별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배움되로 실천하려 합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 미사와 묵상을 하며 늘 깨어 있으려 피정과 작은봉사,
성서공부 그리고 늘 사람들 사이에 영적인 눈을 뜨고 깨어 있으려
노력하며 복음화 학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영성 수련과정도 다니고
본당 카톨릭 신학과정도 배우고 있습니다.
- 2004년 초에 올린글 (글쓰기 2년전 만남의 때를 생각하며...) 언제나 만남의 때에 대한 의미와 가치와 신비를 겨자씨 한알 크기 만큼이라도 알수 있을려나? 늘 개인적 신앙체험안에서 힘들때 돌아보는 신앙의 대전환점이며,시작점입니다. 작성일 | 2005-11-08 오후 11:31:04 | 조회수 | 1195 | 추천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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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배동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여정 성서 공부 요한복음 과정이 야간에 생겼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요한복음 성서공부는 하였습니다만 요한복음 강의가 듣고 싶다는 소망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체력에 때문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야간에 연일 학업을 하고 수업이 없는 수요일 늦은 시간에 성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새벽 5시 기상하고 미사참례, 퇴근후 야간 학업으로 귀가 저녁 11시) 막상 등록하고 보니 힘들어도 수요일 성서 공부가 말씀이 다가오면서 가슴이 설레이며 기다려집니다. 선(先)체험: (영원성 실재 자각)후 성서안에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습니다. 요한 복음 8장 17절을 통하여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듯만 하였습니다. 체험글을 올리는 것은 여정 성서공부과정에서 ① 과거의 원체험(2002년 여름)이 떠오르고 '두 사람이 증언' 이 묵상되었습니다. : 두 수도자의 각각 개인 신앙 체험 ②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의 글 (2005년 4월 뜻밖에 읽음 : 답변 자료에 인용해 놓음)과 P.73 - 하느님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시는가/스즈키 히데로/생활성서 금번 여정 성서공부 요한복음 8장을 배우는 시기에 ③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저서 글에서(2005년 가을 독서중 : 아래에 실려놓았습니다) p360 - 칠층산 /토마스 머튼/바오로딸 참으로 우연히 신앙의 빛에 대한 글을 발견하고 신앙안에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영원성의 실재에 대해 감히 나눔하고저 합니다. 17.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19.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당신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복음 8장 1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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