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회칠한 무덤「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그대로 삼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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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종환 | 작성일2006-12-18 | 조회수1,11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회칠한 무덤「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그대로 삼킴」 회칠한 무덤이란 구약 시대부터 무덤을 회칠로 단장해 왔었나봅니다.(에제키엘 13장 회칠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무덤 속에는 죽은 사람이 들어있는데 겉만 단장한다는 뜻으로 그때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에 맞게 예수께서 “너희는 겉은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장 27-28절) 하고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예로는 놋그릇을 깨끗이 닦았듯이 안과 겉을 다 닦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닦이지 않는 것을 비유하시기 위하여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이 눈 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마태 23장 25-26절)는 등 아무튼 드러난 신분이 가르치는 율법학자와 바리세이인 만큼 율법주의적인 언사나 행동이 겉으로 유독 신분에 맞게 돋보이며 신분에 걸맞은 단장이 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질책 당함은 겉을 단장한다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들의 마음 상태와 그리고 신약의 주님을 깨치지 못하고 깨칠만한 이유가 충분히 되는데도 율법의 제도 이상의 교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는 심산으로 신약이 없었다면 바른 판단이였겠지만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교만과 시기와 질투로 주님을 영접하려함 보다는 자기들의 직권이나 권위 위주로 또한 자기들의 가르침과는 다르므로 또는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모세보다 더 우러러 보이는 신비만의 형상으로써의 주님만을 고대한 나머지 참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그들의 고집과 영적 죽음인 그들의 행실을 보고 주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율법이상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처럼 지금은 주님의 재림과 항상 새로운 약속된 성령의 활동은 적당히 접어두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봉인된 묵시록을 봉인을 때고 밝혀주시는데도 새로운 계시가 무슨 소용이냐는 소리로 물론 성서 외에 다른 계시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묵시록을 새롭게 이루시는 은혜의 참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척도만의 자를 고집하다 행여나 주님을 배척하는 오늘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는 아닌지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순명을 가르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참예언자들을 보내어 말하는 내 말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루가 18장 8절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하는 척도에서 기도해 보자는 뜻입니다. 과연 이 말씀은 그 시대에 대한 믿음만을 두고 하신 말씀만은 아닌 것이며 오늘같은 시대에는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이 재림시대에 대한 믿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루가 18장 1-8절 ‘과부와 재판관’ 편은 루가 17장 20-37절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편 다음에 실린 이야기로써 루가 18장 1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고 하였듯이 6-7절에서 주님께서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하시면서 8절에서는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이 재판은 과부를 위한 재판이 아니라 바로 과부를 비유로한 이 재림시대를 위한 재판인 것입니다. 마태 23장 24절에서 주님께서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지나 않으시는지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루살이의 일같은 일은 철저히 가려내면서도 왜 낙타에 비유된 큰 일, 큰 주님의 일, 큰 예언자들의 일을 걸러내지 못하고 등한시 하여 그대로 삼켜 버리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제, 수도자들도 신분에 맞지 않게 옷만 수도복을 입고 완덕의 단계는 적당히 접어두고 모든 신도들이 자기보다 덕이 없다 단정해 버린듯 권위를 잘못 쓰는 등 영적으로 죽은 오늘의 바리세이는 아닌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다지 바리세이의 교훈을 오늘의 나로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이 교훈은 평신도들에게도 묵상거리가 안되는건 아니지만 어제나 오늘도 율법학자나 바리세이의 신분에 걸맞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리세이의 교훈을 누구에게 적용해서 묵상할 것이며 수단을 입은 사제, 수도자들은 무엇으로 그들에게 걸맞는 교훈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조 : 바울로 사도가 “회칠한 벽 같은 이 위선자!” 하고 면박을 줄 때 직접 사용한 경우(사도행전 23장 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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