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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세리 성지순례하며 기적을 보다
작성자김석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7 조회수2,42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은 하늘의 문 꾸리아에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 성지를 야유회 행사의 일환으로 가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어제 기상청 뉴스에서 오늘 비바람이 불며 많은 비가 내린다는 뉴스를 접하고 행사를 주최하는 꾸리아 간부님들은 많은 걱정을 하셨겠지만 여기 함께 참여하는 우리 단원들도 같은 걱정을 하며 모두 잠바를 걸치고 우산까지 준비하여 아침 일찍 하나은행 앞에 다다르니 벌써 다른 팀  단원들이 도착하여 버스에 오르거나 같은 단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매괴의 모후 쁘리시디움도 12명중 7명이 참석하기로 하여 은행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바람이 불며 비가 조금씩 흩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걱정은 되었지만 야외 놀러가는 것 아니고 성지순례이니 비가 온들 어떠랴 싶어 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기도드렸다.

"주님 오늘 이 행사가 신앙을 위해 몸바친 순교 성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우리들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우리 성당  금년도 사목방침대로 복음 말씀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비록 비가 오더라도 옛날 우리 조상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전파에 목숨까지 바친 것을 본받아  모든 단원들이 무사히 순교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은총 주소서. 아멘."

하고 기도를 바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차안에서 떡이며 음료수를 나누어주는 것을 받고 안내자의 주송에 따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도소리가 너무나 좋아 갑짜기 가슴이 울렁거리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이 서는 것이었다.

기도가 끝날 무렵 눈을 떠보니 햇빛이 비추다가 구름에 숨어버렸다.
비가 올줄로 생각했는데 햇빛까지 비추다니 더구나 더운 날에 흐린 날씨는 여행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공세리에 도착하여 성전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에 왔었던 때보다 상당 개발이 되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으며 싱그러운 봄이라 온갖 나무와 꽃들로 장식된 분위기는 한층 더 우리들 마음을 숙연하게 하였다. 내가 비록 한 것은 없지만 그 동안 성지를 찾은 많은 신자들의 도움과 공세리 신자들의  노고가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성당 안에 자리 잡고 앉아서 조용히 오늘이 기도하며 미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성지의 신부님마다 특유의 재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인지 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신다.
공세리 성당 주임신부님께서도 빠른 목소리로 여러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공세리를 소개하면서 감동을 주셨다.

여기에 잠깐 공세리 성지에 대해서 소개를 하기로 한다.


공세리 천주교회는 1895년 파리 외방 선교회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당시 동네 한 가운데 신자집을 임시로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시작되었다. 그 후 1897년 창고 건물(현 사제관)을 헐고 구 성당과 구 사제관을 임시로 지었다.

현재의 성당이 위치한 80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  곡창지(貢稅 穀倉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성종 9년(1476년) 세곡 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중종 18년(1524년) 80칸의 창고를 지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원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집결한 후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세금을 거두어 임시 보관했던 자리가 400년이 지난 1890년에 들어서면서 내포 지방에 상륙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인 드비즈 신부는 1895년 5월 6일부터 1931년 7월 5일까지 본당 사목을 하였다. 현재의 성당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성당을 완공했다. 드비즈 신부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 조제로 지금은 고인이 된 유명한 이명래 요한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공세리 본당은 내포 지방 신앙의 못자리이다. 1897년 6월 공주 본당 분할, 1901년 안성 본당 분할, 1948년 온양온천동 본당 분할, 1976년 둔포 본당을 분할시켰다.

본당 구내에 삼위의 순교자를 모신 묘가 자리하고 있다. 1863년 조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밀두리, 걸매포, 해암리 신자 28명이 수원, 서울, 공주 등으로 끌려가서 고문,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박의서, 박익서, 박원서 삼형제의 시신을 신자 한 분이 찾아 본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 모셨다가, 그분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에 따라 1988년 9월 20일 본당 구내로 모셔왔다. "명인치명사적" 제 11권에 기록되어 있기를 1867년 병인 풍파를 당해 삼형제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 말하기를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였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2000년 성당과 구 사제관이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제 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10월 새 사제관, 수녀원, 피정의 집(예수마음 피정의 집으로 개칭), 성체조배실을 완공하고 주변 정비사업을 마무리하였다.

공세리 성지의 표어 "순교로 지켜온 110년의 믿음터" 라는 말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점심을 마친 우리 단원들은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아산시 염치읍에 있는 현충사로 향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급제하시기 전까지 사시었던 곳을 박정희 대통령께서 유적지로 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생가뿐만 아니라 17만평에 이른 조경은 유적지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현충사를 둘러보는데  기상청에서 예고한대로 비는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둘러 차에 오르니 오늘 모든 행사가 주님께서 주관하시어 우리들을 편히 성지순례하도록 이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걱정이랑 말고 오로지 우리는 기도하고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따라만 가면 만사 오케이이다.
세상 일이란 것이 다 이와같은 이치가 아니겠나 싶다.
인간이 96%은 쓸데없는 걱정으로 날을 세운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도 주님께서 주관하시니 얼마나 좋은가 덥지 않게 고운 얼굴 햇볕에 그을리까 걱정까지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하다.
비가 온다고 하였지만 성지순례하는 동안은 구름으로 햇빛을 가려주시고 예보한대로 비도 뿌려주시어
더위도 없애주시니 이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순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깨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우리는 기적을 매일같이 보고 느끼면서도 엣날 제자들처럼 표징을 보여달라며 떼를 쓰고 있지나 않는가 반성해보며 오늘 뜻깊은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우리 주 하느님과  꾸리아 간부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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