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운 아버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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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금숙 | 작성일2007-09-27 | 조회수1,42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꿈자리가 뒤숭숭 하다. 보고 싶어도 꿈 에도 안보이시던 아버지가 내 앞에 계셨다. 아버지 가신지도 벌써 십년이 다되어 가는데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을까? 지금에 내 사는 모습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가버리셨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옷깃하나 스치지 못했다. 난 소리쳐서 아버지를 부르다 잠을 깼다. 내 나이 서른 살 에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왜 벌써 결혼을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셨다. 그리고 내 사는 모습을 한동안 보러오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손녀가 태어나서 걸을 때가 되어도 엄마를 통해 이야기만 전해 들 을뿐 오시지는 않았다. 그런 아버지한테 서운하기도 하고 남편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었다. 남편에게 존댓말을 써가며 마주 앉으려 하지도 않으신 아버지를 남편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난 지금도 아버지의 그 때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는 이북에 온 가족을 두고 홀로 남하 하셔서 엄마를 만나 가정을 이루셨다. 두 분 나이차이가 14살 이 나기 때문에 엄마와 난 나이차이가 20살 밖에 나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면서 난 우리엄마가 계모인줄 알았었다. 그때는 너무도 순진해서 결혼하면 그 다음해에 아기를 낳는 줄 알았지 열 달만 에 아기가 나오는 줄 몰랐기 때문에 엄마가 스무 살에 결혼했으면 스물한 살에 아기가 태어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숫자로 계산할 때 엄마와 내 나이가 안 맞는 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이북에 내 친엄마를 두고 다시 재혼한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스무 살 되던 해 초에 결혼을 했으니 그 해 말에 날 낳았다는 걸 사춘기가 지나고서야 이해했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자식을 두게 되어 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학교를 보내고 싶어서 일곱 살 나이에 초등학교를 보내셨고 초등하교 다니는 6년 내내 엄마와 아버지 번갈아 학교에 가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내 아래로 아들인 동생이 있었지만 유독 나한테 정을 쏟으신 아버지는 내가 성장해서 성인 이 되었을 때도 여전 하셨다. 내 직장이 서울 시청 앞 이였고 집은 수원이어서 택시를 타고 출근하거나 고속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었는데 추운 겨울날에는 아침에 단단히 입고 가라고 당부하시고도 걱정이 되어 날 위해 코트 한 벌 을 더 가지고 마중 나오시곤 했다. 아버지와 길이 어긋나거나 내가 좀 늦을 땐 몇 시간 이고 하염없이 추위에 떨면서 날 기다리시곤 하는 바람에 집에 왔다가 다시 아버지를 모시러 나가는 일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 내가 월급을 타서 옷을 사 입는 다고 하면 못하게 말리셨다. 당신 돈 으로 사주셔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시면서 그 어렵게 버신 돈 으로 비싼 내 옷 사주셨다. 아버지는 목수이셨는데 이 쪽 방면으로는 아주 솜씨가 좋으셨기 때문에 나이 칠십이 넘도록 일을 하셨다. 과년한 딸년의 옷을 사느라 늙으신 아버지가 땡볕에서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면 비싼 옷 은 사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입성은 초라해도 직장 생활하는 딸 이 초라해 보이는 건 참지 못하셨다. 말년엔 당뇨로 고생하셨는데 아무리 말려도 그 좋아하시던 커피와 빵을 아버지한테 서 떼어 놀 수 가 없었다. 당뇨에는 커피와 빵은 치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리지 못 한 것은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였던 커피마저 떼어 놓는다는 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신 것 에 안도의 한숨을 돌렸는데 아버지가 병원의 모든 의료진들을 너무 괴롭혀서 더 이상 병원에 계실수가 없어 집으로 간다는 연락이 다시 왔다. 피검사하느라 피를 빼면 당신 피를 빼서 실험을 하는 거라고 매일 뺀 피의 양을 그래프로 그려서 어디다 사용했는지 출처를 대라고 하신다니 동생도 난처했을 것 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보험이 적용이 되니까 아버지가 정상으로 돌아 올 때 까지 병원에서 치료받으셨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모시는 게 아니어서 동생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음이 지금도 후회로 남는다. 다시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물 한 모금 안 넘기고 계셨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을 권했을 때 단숨에 들이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신 의지가 아니게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자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알았겠는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시면서 잠시 정신이 돌아오자 눈을 떠 나를 바라보시곤 “나 오줌 쌌다.” 하시면서 눈물 흘리시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올케가 화장을 하자고 동생한테 말했다고 한다. 올케는 불교신자여서.. 난 반대를 했다. 친척도 하나 없이 우리끼리 의논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돌아갈 고향도 없고 의지할 친척도 없으니 힘 들 때 찾아볼 아버지 산소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동생을 설득하니 순순히 응해준다. 동생하고 근교 산 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 누우실 자리를 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명당을 발견했다. 산으로 둘러 쌓인 저수지를 보고는 바로 이 곳 이구나 싶었다. 평생 유일한 취미이신 낚시를 하실 수 있게 저수지가 내려 다 보이는 언덕에 아버지를 눕혔다. 아버지가 좋아 하실 게 분명했다. 어딘가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화답이시리라... 점점 멀어지는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게 현실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사십구 제 가 있던 날 올케가 믿는 불교식으로 제사상이 차려졌다. 녹음기에서는 금방 사다 끼운 불경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다. 살아생전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돌아가시자 종교와 만나고 있다. 올케는 불교신자 난 천주교신자..... 불경소리가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 질 줄은 미쳐 몰랐다. 가슴이 에이는 듯한 서러운 소리가 집안 가득히 울려 퍼진다. 먼저 큰 남동생이 제를 올리고 맏이인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잔을 올리는 순간 불경소리가 뚝 끊어진다. 동생이 당황해서 다시 버튼을 누른다. 그렇지만 다시 끊어진다. 이번에는 동생이 버튼을 손으로 누르고 떼지 않고 그대로 버튼위에 손가락을 올려 놓치만 불경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음에 다른 동생이 잔을 올리자 다시 불경소리는 계속 된다. 큰 남동생은 당황한 기색이 역역하다. 마침 올케가 모시는 만신 이 방문을 했다. 나와는 일면식이 있는 터라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동생이 이끄는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나한테 인사도 안하고 몰래 가 버렸다. 하루에 세 번을 제를 올리는 게 법도라고 해 다시 남동생들에 이어 내가 잔을 올리자 또 다시 불경소리가 끊어진다. 난 지금도 그때의 신기한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말 영혼이 있는가? 난 올케가 불교를 믿던 미신을 믿던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올케와 신앙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남아있는 엄마가 괴로 울 테니까... 내 평소 생각은 부모를 모시는 것만 으로도 효도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가 엄마를 대신 모셔주지 못 할 바에는 간섭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엄마를 모시고 있는 동생내외가 힘들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엄마한테도 사소한 일에 충돌하지 않도록 당부하고 오면서도 그 이해 할 수없는 일에 한동안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아버지 산소에 가보지 못했다. 내가 이곳에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잠깐씩 한국에 다녀올 때조차 아버지한테 들리지 못한 나에게 아버지가 먼저 날 찾으신 건 아닐까? 그토록 아끼던 큰딸이 아버지를 잊은 게 서운하셔서 꿈에 나타나신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오늘밤 제 꿈에 다시 나타나실 수 있으시죠?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큰딸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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