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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나의 고백 (10)
작성자이용섭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3 조회수1,071 추천수0 반대(0) 신고
내 병이 치유된 이야기
나의 고백 (10)
 
입력 : 2007년 08월 24일 (금) 13:31:42 [조회수 : 407] 이용섭lys979111@naver.com
 
나는 과거 고 이명영 교수와 아주 친했다. 그는 성균관대 교수를 정년 퇴임했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논설위원도 역임했다. 이 교수와의 사연은 여기 당당뉴스 내 기사들 중 "북한 문제를 연구하게 된 사연 1 2 3 4"에 어느 정도 들어있다. 내가 아주 이상한 인간으로 간주해서 아주 가소롭게 여기는 이종석이 이 교수의 대학 제자이다. 이런 인간이 통일부 장관이 되었을 때 나는 폭음을 하면서 통탄에 통탄을 거듭하였다. 이제 대한민국은 망조에 접어들었다고 말이다.

나는 과거 이 교수로부터 약 1년 이상 북한 문제를 배웠다. 그는 나에게 "이 선생은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종교야말로 가장 높은 차원의 학문이라 이 선생은 어떤 종류의 학문도 연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극찬했다. 덧붙여 "어디 가서라도 내 제자라고 말해도 좋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배운 제자는 아니지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일이 희안하게도 굿뉴스(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자유게시판에서 터진 것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하고 통화만 여러 번 한 거기 자유게시판의 권태하 선배(전 방송작가. 천주교인)가 증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 그가 이명영 교수 사무실에 자주 와서 나를 여러 번 보았으며 이 교수가 나에 대해 극찬을 여러 번 했다고 그가 공개했다. 그러면서 권태하 선배가 나에 대하여 "장관 노릇을 할 사람이 남침 땅굴 탐사하다가 망해 가지고 영세민 신세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여기 당당뉴스 내 기사들 중 "쓰리꾼 왕초가 회개하고 구두닦이로 변신한 이야기"는 권태하 선배가 굿뉴스 자유게시판에 올린 것을 내가 대신 퍼온 것이다.

고 이명영 교수는 노태우 정권 시절 안전기획부 부장(전 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 자리 제의가 있었으나 이것을 깨끗하게 사양했다. 그것은 요사이 개신교의 목사들과 천주교와 성공회의 신부들의 행태와 아주 다르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82년 5월 31일부터 담배를 끊기 시작했다. 집에서 되질 않아서 경기도 탄현에 있는 임마누엘 기도원에서 금연에 성공했다. 그후 서울 방학동에서 그 기도원엘 자주 갔다. 당시 거기에서 한 여자 전도사를 알게 됐다. 그녀는 당시 한 30대 말에서 40대 초로 기억된다. 그녀는 자신이 말기 위암에 걸리니 남편이 자기를 버렸고 그래서 산에서 기도하다가 성령 세례를 받고 거듭났고 위암이 치유되었다고 했다.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 했다고 했다.

하여간 그녀와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그녀가 자신이 본 환상(환시) 하나를 얘기했다. 그 환상의 내용은 한신대 (한국신학대학) 학생들이 무진장 보이는데 그 학생들의 이마마다 모두 빨간 콩이 박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한신대 학생들이 xxx들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도라이로 생각하고 그후부터는 일체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그녀 생각이 자주 났다. 이름이라도 알아둘 것을 하며 후회를 여러 번 했다. 그해 금연을 만 7개월을 했다.

90년 5, 6월부터 시한부 종말론 교회에 몇달 다녀보았다. 거기에서도 기적(?) 비슷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그러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떤 노처녀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손벽치며 찬송을 부르는데 그녀의 몸 전체가 럭비공처럼 손벽을 칠 때마다 방바닥에서 약 10센치 정도 통통 튀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나도 그녀처럼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찬송부르며 손벽을 치고 그녀 흉내를 내보려고 했지만 결코 그녀처럼 내 몸이 통통 튀어오르지 않았다. 기적은 어느 종교에나 있다.

시한부 종말론 교회를 다니면서 감신대를 중퇴한 이장림 목사를 여러 번 만났고 그와의 서신 연락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그의 친필 서신 3, 4장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고 나는 인간적으로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가 구속 수감이 되었을 때 그의 친필 서신들을 모두 가지고 서울지검의 담당검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검사는 아주 악질이었다. 자기 사무실에서 내가 나가지 않으면 나도 구속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한부 종말론 교회와 절연하고 나서 여러 달이 흐른 1990년 12월 어느 날 경기도 연천에 있는 밀알 기도원에 갔다. 월요일에 들어가서 토요일 오전에 나왔다. 거기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안수 기도는 받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 "이제부터는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살겠다"고 결심했고 계속 그렇게 기도하고 나왔다. 그랬더니 집에 온 후 저녁 때 쯤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그 증상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래서 즉시 어떤 영어책을 집어서 펼쳐보니 독해가 되는 것이었다. 즉 만 12년을 고생하고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치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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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54년 부산 생, 프리랜서, 전 월간 <시사정경> 객원기자,
전 월간<월드 코리아> 객원기자(차장대우), 전 월간<선택> 객원기자(차장),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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