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새로 정리한 체험담
작성자신기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3 조회수2,512 추천수14 반대(0) 신고

30분 원고 (減縮案)

 

저는 57년 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영세를 하였고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학교로 통하던 서울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말, 아버님이 별세하시고 저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더불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앞길을 열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바라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한 저는 전공공부는 물론, 외국어 습득에 전력하였고, 각종 과외활동과 학우들과의 친교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누구보다 앞서길 바랐고 그만큼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통역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대기업 무역부에 입사한 후에는 제 자랑 같지만 상하 동료 직원으로부터 매우 능력 있고 전도유망한 사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제 나이 스물여덟 때, 지금의 제 아내 크리스티나와 혼인성사를 받고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대기업 무역부에서 실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저는, 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직급을 높여 중소기업으로 옮겼고 여러 동료들의 시기와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리석게도 저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았고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형제, 친척들과 친구들은 저를 인정하고 축복하였으며 무한한 기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가 당연히 받을 만한 것이라고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석한 두뇌와 강한 의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나 될 수 있다고 자신 만만했던 그 때, 출세가 눈앞에서 곧 잡힐 것 같았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때에 하느님은 저에게 그리 대단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1981년 겨울,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저는 천하를 얻은 듯한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82년 3월 25일, 제 운명을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날은 회사 동료 사원들과 함께 아들의 백일잔치를 벌인 다음날이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많은 양의 상품을 수입해가는 일본인 바이어가 저희 계열회사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어에 능통한 사원이 없어 본사 사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사내에서 그 자격을 갖춘 사람은 저로 지목되어 결국 제가 그 바이어를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강남의 어느 호화로운 룸살롱에서 일본인 바이어와 술좌석을 끝낸 저는 밤늦게 택시를 타고 피곤한 몸을 뒷자리에 누이고 살포시 잠이 들었습니다.

 

통금이 임박한 택시는 총알처럼 질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극히 짧은 순간, 제 몸에는 날카로운 충격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강북 쪽에서 오던 자가용이 잠수교 중간쯤에서 미끄러져 제가 탄 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사고 현장에 달려온 교통경찰은, 경찰생활 십여 년에 그렇게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하였고, 순천향 병원 의사는 제가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제 상태가 어떠했는가는 막내 여동생 마리아가 쓴 병상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1982년 3월 25일

 

새벽 0시10분, 순천향 병원 중환자실에 오빠가 입실하다. 온몸에 깁스를 하고, 산소마스크를 쓰고, 수혈을 한 다음, 링거 주사를 맞다. 심전도를 비롯한 각종 테스트 기구가 오빠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

 

많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와 혼수상태의 오빠를 걱정하고 돌아가다.」

 

 

〈주변의 도움들〉

 

▶개신교에 다니는 외사촌 언니께서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가족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다. 하느님만이 오빠를 살리실 분이다.

 

 

〈환자의 변화되는 모습들〉

 

▶사고가 난 지 오늘로 23일째,

 

오빠의 얼굴에 웃는 표정이 지어지며,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난지 34일째,

 

의사 선생님 지시에 따라 눈을 뜨라고 하자 오빠는 왼쪽 눈을 뜨고, 손을 잡으라니까 손을 잡았으며,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다. 글씨도 서툴게 쓰기 시작하였다. 오빠 친구인 한의사로부터 어렵게 구한 웅담을 석 돈이나 받아 복용하기 시작하다.

 

 

▶사고가 난 지 50일째,

 

오후 6시. 오빠가 목사님을 따라 말을 하기 시작하다. 첫마디는 '아멘!'이었다. 모든 기억이 생생한 듯하였다.

 

▶다시 일주일이 지난 후 저는 중환자실에서 몸을 돌려 엎드릴 수 있었고, 죽을 먹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이 무렵 같은 병동에 있는 천주교신자인 자매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 날 자매님은 `묵주의 9일기도`책을 주시면서 저희 부부에게 계속 기도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목사님이 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저와 아내 크리스티나가 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 며칠이 지나자 중심을 못 잡기는 하였지만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해 9월 12일에는 묵주기도 책을 주신 자매님의 안내를 받아 사고 후 처음으로 가회동 성당에 갔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미사를 드리며 저는 감격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님의 품에 안긴 저의 모습은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끌고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속된 말로 가장 잘 팔리던 시절, 1981년 일 년 동안은 가장 중요한 미사조차 참례 않고 살았습니다.

 

영세한 지 이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리고 하느님 대전에서 저희 부부가 혼인성사를 받았음에도, 더욱이 저희에게 귀한 자식을 선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부부는 까마득히 주님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통사고라는 큰 고통은 세속 일에 눈이 멀어버린 저희부부가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초, 사고 발생 여덟 달 만에 저는 퇴원을 하여 집에 돌아왔습니다.

 

▶퇴원 당시의 상태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 퇴원은 하였지만, 내 몸은 모두 망가져서 1급 장애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한 쪽 눈은 완전히 감겨있었고, 팔은 뒤틀리고 오그라들었는 데다가 수전증이 생겨 제멋대로 떨고 있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잡거나 쥐거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리도 마비상태에 있어서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혀와 입술도 딱딱하게 굳어지고 망가져서 내가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 내 뜻을 전하고자 입을 열면, 마치 ‘반벙어리 혼자 악쓰듯’ 나만 힘들었고 상대방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하여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배설하고 움직이는 그 어떤 행동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야 가능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장애를 치유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퇴원 후의 신앙생활〉

 

퇴원하여 집에 있을 당시 저는 사고 후 가족이 철야기도 때 개신교에 다니는 가해자 부인이 아내에게 주었다는 간증집 ‘새롭게 하소서’를 읽고 싶었는데 저는 사고 후부터 신문 글씨 같은 작은 글씨가 안 보여 돋보기안경을 맞추어 쓰고 ‘새롭게 하소서’를 읽었는데, 이 책에 실린 형제들의 신앙체험에 크게 감동하였고 저도 그와 같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러면 먼저 기도를 매일 바쳐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저는 아내와 두 여동생과 함께 묵주의 9일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십자가의 길, 15기도 등도 매일 쉬지 않고 꾸준히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저기 철야기도, 산 피정에도 틈나는 대로 참여하였고 안수기도에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성북동 성당과 요한 보스코 기술원에는 정기적으로 안수기도에 나갔습니다.

 

그 즈음에 이 인복 교수가 번역한 ‘치유를 위한 복음의 열쇠’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부터, 그 책에서 발췌한 성경구절을 쪽지에 적어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걷기운동 때마다 외워가며 기도를 바치곤 하였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바친 이런 기도들은 진심으로 하느님께 바라는 간절한 내 청원이었으며, 그 모두가 내 몸의 치유를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나 혼자만을 위한 기도를 했었구나!’ 여겨져 부끄러웠습니다.

 

 

〈두 가지 신비체험〉

 

아울러 나는 신심 좋은 형제자매들의 권고에 따라 성령세미나에도 열심히 참석하였고 음성의 꽃동네도 방문하였으며 성경도 통독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즈음 나는 두 개의 신비체험을 경험하여 큰 감격과 마음의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 주님 위해 크게 쓰임 받는 삶이 되길 빌며...!’

 

어느 날, 세미나를 받고 집에 돌아온 저는, 입원해 있는 동안 가족이 철야기도 때 목사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성경책을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

 

맨 첫 표지에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 주님위해 크게 쓰임 받는 삶이되길 빌며...'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은 제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삶은 바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저의 삶은 온갖 세속의 물질생활과 출세지향적인 인간 생활에만 더 큰 가치를 두는 생활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일들에 연연하며 많은 시간과 비중을 두고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으로 안타까운 자책감이 엄습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잠이 깨자마자 저의 입에서는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 주님위해 크게 쓰임 받는 삶이되길 비옵나이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일어서면서, 화장실 가면서, 양치하면서, 세수하면서, 식사하면서 똑같은 기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온종일, 그리고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였습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다

그 다음날이 성령세미나 매일묵상 3주 3일째였는데 묵상내용이 <사행2,1-4>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때에는 돋보기를 안 쓰고도 작은 글씨가 보여 매일묵상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묵상 중 저는 이상한 언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크리스티나를 불러 심령기도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심령기도를 하며 저에게는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빠른 속도로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하던 중 저도 모르는 말, 이상한 말이 갑자기 제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제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였으며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굳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감격에 겨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기도요령의 변화〉

 

영성적인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참된 신앙생활을 배우고 치유를 위한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내 안목도 점차 내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기도에도 여러 종류와 방법이 있어서 그 신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재기도

 

먼저, 자신의 희망사항을 청원하는 기도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즉 중재기도가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다른 불쌍한 이들을 지향하고 열심히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영육이 장애를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그들의 치유를 하느님께 청원하였습니다.

 

내가 주님께 청원드렸던 그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답 받을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하느님의 응답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사실도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1984-1985 2년간은 정말로 바쁘게 하루 종일 기도에 전념했는데, 신문이나 TV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필리피1,21>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한 바오로의 말씀이 바로 저에게 해당되는 말씀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웃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 사랑’

 

그 즈음에 신정동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이 주일미사 때에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강론 말씀은 오래도록 저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이웃, 특히 제일 가까운 저의 가족, 아내와 아들을 통하여 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마가 아플 때면 아빠가 기도를 바치는 것을 알고부터, 자기가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손으로 이마를 가리키면서 두 손을 모으는 시늉으로 기도해 달라고 보챘습니다.

 

아들이 돐을 갓 지난 때였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일어서면 그 어린 것이 얼른 저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었고, 제가 지팡이를 짚고 현관을 향하면 아들은 먼저 달려와 운동화를 챙겨주곤 하였습니다.

 

1984년 봄, 교통사고 보상 문제가 결정되고 서울 신월동에서 신정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 저는 운동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방과 마루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는데 운동을 하고 방에 앉아 있노라면 아들이 제 발바닥이 더러운 걸 보고 '아빠 지지'하며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저에게 변기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합니다.

 

제가 변기 위에 걸터앉아 세숫대야에 물을 받으면 아들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제 발에 비누질을 하고 말끔히 닦아줍니다.

 

이것은 아들이 고작 두 살 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주님께서 손수 저의 발을 씻어주시는 듯이 느껴졌고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의 발을 씻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겸손을 저에게도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도시간에 아들 친구들이 놀러오면, 아들은 친구들에게 '아빠, 기도!'하면서 친구들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또 제가 외출 전후에 성모님께 꼭 인사를 드렸는데 어쩌다 제가 잊은 경우에는 아들이 성모상 앞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하여 저에게 인사 안 드린 사실을 깨우쳐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기도생활

 

저의 기도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저는 1984년 1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시성될 한국순교 103위성인 사진 앞에서 시성될 복자 한분 한분을 호칭하며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 식사 후, 저녁 자기 전에 매일 하루 3번씩 저와 저희집안에 베푸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 국민에게 어서 전할 수 있게 저의 치유를 위해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치유를 지향하며 매일 묵주의 기도 5단, 십자가의 길, 15기도 등을 꾸준히 바쳤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간구에 주님께서는 저를 조금씩 조금씩 고쳐주셨으며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저를 완치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육신의 치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하나 되는 생활 추진

 

한 동안 저는 기도에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우리 가족의 뜻을 존중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저의 기도생활도 중요하지만 이 시간 주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가족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아침에 동생들 출근시키랴, 집안 청소하랴, 그해 태어난 둘째 아이 돌보랴, 기저귀 빨래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저는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무언가 우리 가정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방 이불과 요는 제가 개어 옷장에 얹었습니다. 방도 제가 쓸었습니다.

 

 

1985년 가을 아내는 세를 놓았던 점포 문방구를 인수받아 직접 경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일을 보아야 했으므로 집안일에 손이 더욱 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기저귀는 제가 개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우 열 개 정도의 기저귀를 개는데 처음에는 한 시간도 넘게 시간이 걸렸으나 나중에는 20분으로 줄었습니다.

 

저는 기저귀를 개면서, 이불을 개면서, 방을 쓸면서 주님 은혜를 되새기며 끊임없이 주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집안 살림 안정시켜주신 하느님 (물적 은총)

 

 

제가 아내의 문방구 영업을 도울 수 있게 되자, 부부가 함께 있으면서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는 일이 자주 생기고 생계유지도 여전히 어려워지자, 아내는 더 나은 생계대책으로 남대문 새벽시장 옷가게에 점원으로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옷 장사는 아내의 적성에 맞지 않아서 저희부부는 주님께 크리스티나에게 알맞는 품목으로 영업을 옮겨 주십사하고 한동안 계속하여 온 마음 다해 기도한 후 악세사리 점포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사가 잘 되었고, 마침내는 지닌 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제가 돈을 빌려주어 이 점포를 매입하여 운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집안 살림은 더욱 넘치고 풍성해져서 그 후 1993년, 집을 새로 짓느라 은행에서 융자받은 돈까지 모두 상환하고 지금은 일산에 있는 46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하여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1991년 5월부터 2003년 2월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12년 동안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의 수학과목을 전문으로 과외지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아직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말이 부족한 저에게 학생들을 맡겨주셔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데 대해 주님께 감사하면서 매일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고 성모님께 묵주기도와 삼종기도를 드렸습니다. 은총을 받은 덕분으로 학생들 성적이 많이 올라가 어머니들이 고마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일산으로 이사와 수학 과외를 접었으나 2007년 1월 마두동성당 신자인 자매님이 중학교 3학년인 딸을 맡겨주셔 중학수학 과외를 다시 시작하여 지금은 2명의 중학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기도에 대한 변화

여러분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혼자서도 잘 걷습니다. 아직은 속력을 낼라치면 조금은 뒤뚱거리지만 이제는 마음먹은 대로 걷고 밥 먹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해왔고 또 할 수 있었던 기도는 염경기도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인쇄된 기도문, 머리(지성)로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가슴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독백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기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정적, 평온, 한가로움 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침묵’의 참 뜻도 곧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성모님과도 내적담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귀로 들은 것처럼 분명하고 말을 통해 듣는 것보다도 더 분명합니다.

 

▶시련(큰 고통, 죽을 뻔한 큰 사고)의 의미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을 산지도 어느덧 27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생겼을 리 없고 이와 같이 주님의 큰 사랑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저는 이 육신의 고통을 언제나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기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제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나,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의 수학 과외지도를 할 때나, 가족과의 일치, 두 아들 교육문제 등 생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미사성제와 성체에서 은혜를 받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내 크리스티나가 저 대신 가계를 도맡아준 덕분입니다.

 

‘당신은 죽었었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셨으니 당신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에요, 따라서 가계는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주님의 일만 하세요’ 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항상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도 오늘도 하느님을 좀 더 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일을 잘 하기 위하여 신경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육신의 불편함은 완치되지 못하였지만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으며 어머님과 아내와 함께 사랑으로 일치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 저의 처지 그대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작은 일에 감사하고 충실하며 차근차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형제자매들과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열심히 나누려고 노력하면서 생동적이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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