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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쓸데 없는 눈물
작성자이봉순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02 조회수2,078 추천수8 반대(0) 신고

     토마스 드 칸팀브레에 의하면, 어떤 어머니가 죽은 아들 때문에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시를 보았다. 젊은이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크나큰 기쁨으로 충만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멀찍이 떨어져 그의 아들이 간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 얘야 어찌하여 혼자서 다른 사람의 뒤를 따라 가고 있느냐?"

아들은 젖은 옷을 보이면서 말한다.

"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흘리시는 이 쓸데없는 눈물 때문에 무거워서 걸어 갈 수가 없군요. 부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시고 미사를 드려 주세요. 그렇게 하면 제가 승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매년 11월 위령성월을 맞이하면 다시 한 번 책장에서 '연옥 실화'를 꺼내 읽게 됩니다. 그 많은 실화 중 '쓸데없는 눈물'을 읽다보면 늘 떠오르는 등단 작품이 한편 있습니다. 오늘은 그 수필을 정리해서 게시판에 옮겼습니다. 공감하는 분들 있을까 해서요.

 

                                                       해지 통장

 

   해지청구서에 남편의 이름을 쓰려니 눈물이 핑 돈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까지 얼마 되지 않는 예금 통장을 한동안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남편의 이름을 공적인 장소에서는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써야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금 실명제 운운, 하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생각하다가 정리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가느다란 떨림과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은행 문을 나서니 고운 햇살에 그의 이름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문득 '소월'의 '초혼'이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에 손짓하며 다가온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는 비극적인 민족을 죽은 애인으로 표현하여 비탄조로 읊었다는 비평이 주이지만, 오늘 내게 다가온 소월의 시는 순간 그리움과 애처로움이 빈틈없이 파고들어 공감케 한다.

    가로수의 나목에는 물기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봄이 와도 들을 수 없다는 허무감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간간이 애상을 뿌리며 걷는 길목 화원에는 난, 매화, 동백 등, 만개한 꽃들이 다채로운 빛깔과 요염하고 청순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창밖을 서성이는 나를 향해 당신에게도 곧 봄이 온다고 힘을 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수술 후 곧 회복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믿었기에 숨지기 두 시간 전만해도 전혀 예칙하지 못한 그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화석처럼 굳어진 멍한 정신에 알부민을 투여한 듯 실눈을 뜨게 한 것은 죽기까지 혼신을 다하던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갈망하는 삶을 살게 놔두었다. 늘 착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이들을 향해 웃고만 있었다. 공학도였던 그가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에게 '잘 택했노라.'격려해주던 욕심 없는 아버지였다. 통통한 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집을 나가 동네 어귀 포장마차에서 딸의 귀여운 입에 곰장어며 해삼, 멍게를 입에 넣어주며 곱씹어 먹는 딸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장난기 많은 아버지였다.

     또한 그와 나, 공존에는 천공의 바람이 우리의 사이를 드나들도록 자기 속에 나를 속박하는 일이 없었다. 이 자유가 그동안 격은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나를 늘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고 신앙인으로서 성숙해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둠이 깔린 자의식 속에 고독이 드리워져 밝은 빛을 그리워할 때, 그는 말없이 나의 피정이나 여행을 도와주곤 했다. 이른 새벽 기도를 마치고 책이라도 뒤적일라치면 슬며시 일어나 커피를 끓여 밀어놓곤 했다. 긴 겨울 밤, 놋쇠화로에 피어나던 화롯불 같던 사람 이제 그는 떠나갔지만, 아이들과 나는 때론 방 안 가득히 채워져 있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산다.

   "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따라서 우리는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 라는 간디의 말처럼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슬퍼하지 말고 더욱 밝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 그의 영혼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맺어준 부부의 인연이었기에, 세상에서 다하지 못하고 간 그의 사랑의 몫까지 대신 살아주어야 할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해지통장과 함께 그의 이름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비누방울처럼 서서히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남기고 간 사랑만은 삶이 힘겨워도, 가끔은 환하게 웃으며 살아갈 용기를 아이들과 나에게 선물하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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