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체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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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8-12-04 | 조회수6,037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성인전이나 묵상서에 나오는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는 기쁨을 정의 하자면은 서편제에 김명곤이 한 대사와 비슷하다. "득음을 하며는 임금대는 것 보다 좋고 정승,판사 보다고 좋고 고기국 먹는 것보다 좋으며 밥 먹지 않고도 배부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이 세상 어떤 부귀 영화보다도 좋고 힘을 주며 기쁘고 만족감이 있다. 특히 하느님과 처음 만나는 동안의 기쁨은 예수의 데레사 (축일:10.15) 표현대로 라며는 허니문과 같다. 그 만큼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몸의 상태는 어떤 반응이 있는 것인지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인지 현존은 탈혼하고는 다르다. 그것은 아주 위대한 분들이나 관상 중에서도 신비체험의 속하는 일들이다. 하느님 체험이라는 것은 단순하다 기도하고 기도 중에 느낌들 안에서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노하우를 정직하게 쌓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수퍼 컴퓨터에서 확률을 넣어 나올 수 있는 한 나오게 하는 것 보다 더 자유로운 분이다. 몇 천대 모아도 그분의 반응을 다 정의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처음에는 출애굽 이전에는 하느님을 표현 할 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다가 출애굽 이후에는 나의 하느님으로 바뀠다. 그것은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이 그 누구의 하느님도 아닌 바로 자신의 하느님 이시기에 그런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이랬는데 하느님은 내가 왜 이렇게 안 해 주시는 것만 쫓는다면 다른 이들 안에 게시는 하느님과 멀건히 바라다 볼 뿐 절대로 나의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다. 토마는 내가 가장 용기 있는 사도로 보는 사람중에 한 분인데 그분은 용기가 있었다. 남들이 부활한 예수님의 대해 말했을 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은 아직은 십자가의 예수님이므로 남들이 부활한 주님이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려 한다. 예수님이 그의 용기에 웅하시어 자신의 십자가의 상처를 부활의 힘으로 승화 시킨 것을 보였을 때 그는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 한다. 베드로로 사도 요한의 예수님이 아닌 바로 자신의 예수님으로 확인한다. 그는 남들이 하니깐 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 했고 그 주님께 진실되고 성실하게 물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시선을 둔다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을 왜곡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느님 체험의 노하우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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