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보통 사람의 성인되기 | |||
---|---|---|---|---|
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8-12-21 | 조회수5,450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예수회에 모토는 "하느님께 보다 큰 영광을 드리자"이다. 작은 예수회의 사제이자 성모기사회 창시자인 막시미안 콜베 성인은 그 모토를 "하느님께 보다 완전한 영광을 드리자"로 바꿔서 늘 주창 하셨다.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란 없기에 그것을 어떻게 하면 보다 완전하게 드릴 수 있는가가 그분의 관심사였고 그래 나중에 주창하신 것은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 그것은 모든 성인들이 한번은 거론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진정 드릴 수 있는 것은 순간의 지향이요 감사요 찬미요 영광 뿐이라고 성인들은 말씀 하시곤 한다. 한데 바치는 것이 무엇일까 늘 묵상하게 된다. 이것을 했으니 하느님은 영광 받으소서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는 중에 답을 얻은 것은 십자가의 길 6처와 7처의 묵상을 한 후 였다. 베로니까의 예수님의 얼굴 씻겨 드린 일을 참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내 묵상에서 베로니까의 수건은 베일로 묵상하기 좋아하는데 그건 예수님의 수난을 참여하는데 뭔가 쳉겨 갈 여유가 과연 그녀에게 있었을까? 때문 그녀가 두르고 있던 베일로 너무나 상처난 모욕받은 얼굴을 씻겨 드리고 싶었을 것이고 그녀는 병사들의 창이나 칼에 위협 사람들의 몰이해를 넘어 예수님께 가 얼굴을 씻겨 드리고 위안해 주었을 것이라고 묵상한다. 근데 그 다음처에서 예수님은 무참히 다시 넘어지신다. 다른 넘어지심보다 이 넘어지심에 내가 맘에 쓰이는 것은 웬지 베로니까의 씻겨드림 다음에 곧바로 넘어지셨을거란 느낌 때문에 그렇다. 어떻게 씻겨 드린 얼굴인데 예수님은 조금만 더 가셔서 넘어지시지. 그러다 내가 무슨 소유권 주장이라도 하는 듯 하느님께 항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묵상했다. 하느님의 사업에서 있어서 그분이 마련해 주신 것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지 내가 이 모든 일에서 있어서 한 일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뭔가 내가 이 만큼 했으니 진행이 잘 되어야 하고 성과가 좋아야 하고 결과가 좋게 유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을 바라게 되는 듯 싶다. 베로니까의 얼굴 씻겨 드림은 그 자제로 영광 돌려야 하는 것이지 다음 수난의 영향을 받지 많아야 하고 유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월권이다. 그래 결국 얻은 묵상의 결론은 하느님께 의탁해서 내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막시미안 콜베 성인의 주창처럼 "하느님께 보다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모님을 통해 그 영광을 드린다면 변질될 우려도 없다.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 그런 삶이 또한 성인들의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