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로 하는 묵상 | |||
---|---|---|---|---|
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1-20 | 조회수3,54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사람들이 나를 바라다 보는 것이 진정한 내 모습은 아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알고 지내고 있으며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많은 것을 알고 훌륭한 사람인가에 상관없이 그가 보는 내가 나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내가 나를 바라다보는 것도 나의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던가 감정적으로 흔들림에 기초해서 나를 바라다 보게 되므로 날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알 존재는 하느님 뿐이다. 아오스딩이 "당신 안에 쉴 때까지 내게 쉼은 없습니다." 했듯이 하느님만이 제대로 날 알고 바라다 보고 판정하고 알고 계신다. 하느님이 날 어떻게 볼까? 묵상해 보건데 정의의 하느님이 날 바라다 보신다면 한 없이 실수투성이고 죄덩이러 일 것이고 자비의 하느님이 보신다면 사랑스러운 존재겠지. 하나 이런 생각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정확히 하느님의 결정은 아니다. 하느님은 삼위면서 하나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날 분리해서 생각하실 이유가 없다. 내가 존귀하고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느님이 날 존재 시키셨다는 것이다. 내 모습이 장애인이고 남들 눈에 그렇게 잘 사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합법적인 결혼의 의해서 난 이 세상에 존재 했고 내 존재의 대한 원죄적 모습은 없다. 하느님이 날 존재 시키셨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난 긍정적인 것에 극치이다. 물론 혼외자나 그 밖에 사람들은 그런 어떻게 되겠는가 묵상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정상인이 장애인의 대해 우월의식을 갖듯이 내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다른 눈에 장애인인데 별 자신감을 다 갖는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대단히 긍지를 느끼는 일이다. 왜 사람들의 이기적인 이유로 과학의 산물이 아니라 뜻이 있어서 하느님이 날 존재 시키셨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에서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고 원인과 과정을 알며는 결과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카우스 이론도 아는 한도 내에서는 결과예측을 위한 한 방식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치를 누가 보냈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 보시랴 어렵게 살았는가 그래도 아직 내가 살아 있고 살아가려 한다면 그 시련은 나를 이긴 것이 아니다.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가? 그 고통을 바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셨다. 바울은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너희는 자비를 베풀어라"말을 상기 시키며 사랑의 의무는 다 할 수 없다고 강조 하셨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고 악한 기분이 악으로 갚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난 신앙을 갖고 있고 그 신앙은 날 살렸다. 날 구원 했다. 모든 악한 감정에서 그리고 내 스스로를 포기하려는 모든 것에서 난 그래서 열심히 살 것이고 당당히 살 것이고 궁지를 갖고 살 것이다. 내가 많이 배웠다거나 부자라거나 이쁘거나 뭐 그런 것 떄문은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날 존재 시키셨고 하느님을 믿게 해 주셨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이 마음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나의 참된 기쁜 소식이며 나의 구원의 증거이다. 당신은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