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랑의 치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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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3-01 | 조회수3,553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치유기적에는 두가지 것이 있다. 영에 치유와 육에 치유 치유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 말로는 하느님은 육에 대한 치유청원은 가끔 들어 주시지만 영에 대한 상처 치유는 100% 들어 주시고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상처를 주었거나 받았던 대상도 치유 하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생명에 하느님고 용서의 하느님이며 사랑에 하느님 이시기에 그렇다. 그분의 정의 마저도 인간을 치유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쓰시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게에 요구하는 그 많은 부당(?)한 요구들이 궁국적으로는 생명을 주고 부활을 주기 위해서 였지만 우리가 하느님에게 요구하고 청하는 것들은 무엇을 위해 청하는 것인가? 성서에 정확이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해 늘 말한다. 한 모습은 성탄 때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님이며 한 모습은 십자가에 내려져 온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하느님은 성모님께 보드랍고 앙증 맞으며 사랑에 찬 아이 모습에 예수님을 안겨 준 것에 비해 우리는 성모님꼐 그 앙증맞고 보드랍던 아이를 장성하게 키워 기쁨과 위안을 주리라 믿었던 아들을 십자가에서 갈기 갈기 찟어 놓은 모습으로 죽음으로 안겨 드렸다. 다른 이들 불신자가 혹은 이방인이 죄인이 한 것이라고 여기는가 아니다 바로 우리다 당신과 내가 그랬다. 난 살면서 죄 지은 적 없다고 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 역시 도덕적인 죄는 태어나 한번도 지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랑에 죄를 묻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영혼을 위한다는 것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요만큼에 단 한 순간에 위안도 받지 않고 돌아 가신 것에 베해 우리는 작은 희생에도 얼마나 많은 위안을 찾고 알아 줌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을 탓 할 것 없다. 내가 주님께 충분히 드리지 않고 있기에 주님이 이 세상을 충분이 정화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나 없이도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함께 하기를 요구 하셨고 구경꾼이 아닌 같이 하는 동지로 우리를 불러 주셨다. 성서 말씀 그대로 "듣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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