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PBC]6월4일연중 제9주간 금요일 독서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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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한구 | 작성일1999-06-01 | 조회수3,02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PBC기쁜소식 밝은세상] 6월 4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독서묵상 자기 인생의 의미를 볼 수 없다면 지금 여기, 이 순간, 현재의 삶의 위치로까지 많은 빗나간 길들을 걸어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영혼이 절벽을 올라 왔음도 알아야 한다. 그 상처, 그 방황, 그 두려움을, 우리는 삶의 그 불모지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지치고 피곤한 발걸음들이 없었더라면 오늘 날 이처럼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갖지 못했으리라. 그러므로 기억하라. 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자기가 걸어온 그 길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우리 여행자는 끝없는 삶의 길을 걸어간다.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수많은 모퉁이들을 돌아가야만 한다. 들리지 않는가. 지금도 그 진리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삶은 끝이 없으며 우리는 영원 불멸한 존재들이라고. '다른 길은 없다'라는 마스터 스목의 시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토비트와 라구엘의 가족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먼길을 헤쳐가야만 했던 걸까요.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사는 토비아와 사라가 부부로 맺어지기 위해서 그토록 험한 모퉁이들을 돌아야만 했던 걸까요....... 지금까지 고생만이 지겹게 이어지던 운명들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행복과 축복으로 반전되었습니다. 토비아는 맡겨둔 돈도 찾아오면서 색시까지 얻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비상의 약을 몸에 지니고 말입니다. 토비트가의 축복은 이제 도리어 니느웨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데요. 아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을 그토록 먼 고생길을 돌아서 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셨던가 봅니다. 복음묵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었지요.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되는데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더 높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일찍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이 말은 예수님이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혹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라고 유다인들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면, 유다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유다인들은 그 자리에서 옷을 찢으면서 예수님께 돌을 던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웅이신 분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분명 오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입에다 올려놓은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들은 오늘 복음을 접하면서 복음이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보다는, 신앙의 진리들을 전하려고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복음의 저자들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적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삼 사십년 후부터 기록되었으니까요. 따라서 복음은 역사사실보다 신도들이 그들 삶에서 고백하고 만났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는 셈이되지요. 시간이 흘러가면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였는데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은 어쩜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마르코 복음의 저자가 이 복음을 쓸 당시에는 엄청난 선언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한낱 떠돌이 선생에 불과했던 예수님이, 그들의 위대한 영웅 다윗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에게서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떨까요. 우리 자신들도 초대 교회처럼 예수님 안에서 우리 삶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들은 말과 형식으로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고 있는 걸까요.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초대교회는 당신의 삶 안에서,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적은 그들 삶을 구원하였고 하느님 나라로 이끄셨지요. 그들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자비였고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 초대교회는 그들의 그러한 체험을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속에 담았지요. 예수님, 우리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속에는 우리 삶의 체험이 녹여있지를 않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예수님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성처럼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예수님,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 때문에 얼마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죽어 갔었는지요. 이 고백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들의 삶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참된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이 저희 삶의 참된 주인이시고 세상의 참된 주인이심을 인정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저희들이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하심을 깨닫는 장입니다. 예수님, 우리들이 실제로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으로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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