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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PBC]6월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독서 복음묵상
작성자조한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6-08 조회수2,351 추천수2 반대(0) 신고
기쁜 소식. 밝은 세상

[PBC기쁜소식 밝은세상]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독서묵상

교회를 가르치고 이끌어 나갈 일꾼으로서의 신임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요? 물론 지금의 교회는 제도교회가 이러한 신임장을 주지요. 하지만 초기 교회는 지도자들끼리 대립이 잦았고,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도 아직 확정이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서로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가슴아프게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던가 봅니다. 오늘 독서도 고린토 신도들의 바오로 사도에 대한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데요, 아마 고린토 신도들은 유데아나 다른 곳에서 온 선교사들이 하는 말을 듣고, 바오로의 신임장에 대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던가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임장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음에 새겨준 신임장이라고 답변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고린도 신도들의 돌같이 딱딱한 문자주의적인 사고와 바오로 사도의 자유롭고 생기있는 사고를 만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문자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알아듣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말씀의 참뜻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문자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문자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알아듣기 때문에, 문자 마디마디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문자주의는 돌처럼 딱딱하고 차갑기 때문에, 거기에는 생명력과 자유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의 이런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에 새로운 정신을 대조해 보여주는데요, 그는 눈에 보이는 신임장보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신임장이야말로 참 된 신임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위와 신분을 보장해 주는 글로 된 신임장보다, 그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각인 된 신임장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신임장이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전하라.'는 우리 모두가 받은 사명이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들은 여전히 고린토 신도들처럼 사람에게서부터 오는 신임장, 돌같이 딱딱하고 생명력이 없는 신임장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마음에 새겨진 영광스로운 신임장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복음묵상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평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먹보요, 술쟁이요,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평가이지요. 이러한 평가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율법을 어기거나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평가인데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어 왔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의 폐기를 공공연하게 보여 주셨으니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누구나 고개를 돌려 하느님 나라의 실제를 보게되고,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는데요, 거기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 높은 사람이나 종과 같은 귀천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판판한 식탁에 평등하게 앉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의 입에 올려진 말씀은 무슨 영문일까요. 아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오 복음의 저자나 마태오 공동체의 상황으로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가 유다인들을 당황하게 하였듯이, 마태오 공동체에 속해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당황하게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변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초기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율법을 지켰었다고 합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교 그리스도 신도들은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단면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는 것 같은데요, 그들은 예수님의 자유로운 정신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어서 혹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변론에서 율법에 대해서 자유로웠던 예수님의 살아있는 모습을 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리켜주셨는데, 사람들은 당신께서 가리키는 하느님 나라는 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키는 당신의 손가락만 쳐다보게 되었다고 하는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가리켜주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옛것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율법과 문자주의입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 역시 당신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초기 유대교회가 당신을 율법에 다시 얽매이게 했듯이,

저희들은 우리 식으로 당신과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얽매이게 하고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저희들 마음대로 당신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식으로 만들어낸 당신의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우리를 찾아오시는 당신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살아있는 당신의 참된 가르침 속에서 저희들이 자유와 생명을 숨쉬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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