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상대방의 잘못은 내 인생의 거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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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선환 | 작성일1999-06-20 | 조회수3,080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알로이시오 곤사가 기념) <상대방의 잘못은 내 인생의 거울> 창세 12,1-9; 마태 7,1-5
사람은 혼자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과 함께 사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닙니 다. 인생의 기쁨과 괴로움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이 유 때문이라도 종교적인 교훈이 필요하게 됩니다. 남과 함께 살면서 어려운 일들 이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내 눈에 남의 잘못이 비치게 되는 경우입니다. 남이 잘한 일은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세월과 예리한 관찰 분석이 필요 하지만 남의 잘못은 금방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나도 상대방에게는 남이 된다는 것을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온통 남과 남이 모여서 살고 있다고 도 할 수 있습니다.
잘못은 고쳐져야 하고 다스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다행히 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과실은 법으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법이 미 치지 못하는 숱한 잘못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잘못들, 부 모 자녀들을 갈라놓고 형제지간이 갈라져 우애를 짓밟는 잘못들은 어떻게 처리하 면 좋겠습니까? 여기에는 사실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습니다. 서로가 자신은 잘했 고, 상대방은 못했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전 전한서(前漢書)를 보면 [남의 공은 기억하고 과실은 잊으 라]고 했고, 서양의 격언에서는 [남을 고쳐준다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침묵 하는 것이 열 번 더 낫다]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고쳐준다 는 것이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남을 탓하거나 남을 고쳐주기 위한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조치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남의 잘못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반성하 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뜻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 람이 저지른 외적인 잘못을 단죄하는 것은 법이 해주게 되고, 내면의 잘못을 판 단하고 단죄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안타깝 거든 판단하거나 단죄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자기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구제의 방법이라는 설명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남의 잘못을 판단하면 나 자신의 잘못 도 판단 받아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 판단의 척도는 내가 남을 판단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의 짧은 비유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을 납득 시키고 계십니다. 들보 만한 가시가 눈에 든 사람이 남의 눈에서 티를 꺼내 주겠 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먼저 인간성 의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위선자라고 말하게 되 는 것이죠.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우리 나라의 재미있는 격언 도 이쯤에 해당될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어조입니다. 그래 서 쇠귀에 경읽기라든가, 소경에게 금강산 구경시키기, 귀머거리에게 교향곡 들 려주기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공연히 미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표현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들 내면 속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들어 있고, 바로 그 점을 상대방으로부터 보게 되기 때문에 공연히 미워하게 된 다고 설명한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칫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 그들 편에 서 계시 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남의 잘 못을 따지고 판단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눈을 돌리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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