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PBC]6월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독서 복음묵상 | |||
---|---|---|---|---|
작성자조한구 | 작성일1999-06-28 | 조회수2,93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PBC기쁜소식 밝은세상]
6월 28일 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독서묵상 구약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분노와 질투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약에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무척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하느님은 무한히 용서하시고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었으니까요. 구약과 신약에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이 왜 이토록 다를까요? 아마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상황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라를 잃고 남의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분노를 사서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셨던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죄인들에게나 언제나 한결같이 햇빛과 비를 똑같이 내려주시는 분이셨지요. 구약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참지 못하시고 분노하시고 벌하신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데요. 오늘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나누는 대화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아브라함이 하느님보다 더 자비스러운 것 같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것을 고대인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하였듯이, 혹시 사람들 심중에는 어떤 재앙을 보게 되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생각하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역설적으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스러운 상황에서도 세상을 사랑하셔서 심판을 미루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의인이 열명 이상 있어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다리신다고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소돔과 고모라인들보다 죄가 적다고 누가 감히 떳떳하게 나서서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복음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사실 예수님은 오늘은 어디에 머리를 뉘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방랑자 선생님이셨지요.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람들의 관대함에 맡기면서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집에 초대를 받아서 편안한 잠자리를 뜻밖에 얻을 수도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은 언덕이나 동산에서 밤을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일정한 거처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거부하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던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생활방식과 정신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 제자는 먼저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참 당연한 부탁이고, 예수님은 당연히 죽은 부친의 장례를 치르게 해주어야 옳지 않았을까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장례 문제는 우리 나라 만큼이나 중요시되었다고 합니다. 장례 절차도 복잡하고 까다로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에도 냉정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나를 따르라." 깜짝 놀라 기절 초풍할 이야기이지요. 죽은 나자로를 찾아가시고 눈물까지 흘리시던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죽은 사람의 일이나 혹은 죽은 후의 일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우리들을 따끔하게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너희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힘써라."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저희들은 그들을 쉽게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미련을 갖고 아쉬워하고, 혹은 장례 절차나 제사 문제에 지나친 신경을 써야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의 문제로 생기는 가족간의 갈등도 많지요. 저희들은 은연중 죽은 사람에게 참 많이 매달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 당신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의 문제는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어라. 그리고 너희들은 하느님 나라에나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살아있을 때 잘못하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게 잘 할 수는 없겠지요. 어쩜 우리들이 죽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자신을 은폐시키기 위한 수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위험을 무릎쓰고 싶지 않으니까요. 예수님,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어도 하느님의 자비를 완전히 신뢰하셨고, 사람들의 관대함에 의지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죽은 다음의 문제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 속에 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