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월26일 독서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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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한구 | 작성일1999-07-27 | 조회수2,57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7월 26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독서묵상 모세가 시나이 산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졸라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왔고,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받았었거든요.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과 단절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답답한 마음에 자신들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자신들이 필요할 때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의 형상을 만들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 에집트인들이 하듯이 말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을 돌면서 춤을 추며 환락의 잔치를 벌이고 있을때, 마침 십계판을 든 모세가 산을 내려오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모세는 이런 한심한 백성들을 보고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모세는 십계판을 던져버리고,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빻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한 후, 아론을 질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보아온 대로, 자신들을 인도해 줄 신을 자신들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었을 테지요.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서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응답 또한 완고하십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징을 하신다는 대답하시는데요. 후에 모세와 함께 에집트를 탈출했던 광야 생활 1세대가 가나안 복지를 눈앞에 두고도, 가나안 복지에 들지 못했던 이유로 금송아지 사건이 거론되지요. 여기서 우리들은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신 신약의 하느님의 이미지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이 질투의 하느님이시고 복수의 하느님이신 반면, 예수님의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이시지요. 복음묵상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비유로 이야기 하셨지요. 그리고 이야기는 쉽게 이렇게 시작하였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청중들은 자신들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호기심을 가지고 쉽게 이야기에 빠져 들수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겨자씨가 싹이 나고 잘 자랐다로 끝났다면, 그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요. 예수님의 청중들은 대부분 농노들이라고 했지요. 그들에게 가장 귀찮은 풀은 겨자였답니다. 반면 모든 유다인들에게는 다윗왕국의 재건에 대한 열망이 불타고 있었는데요. 그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다윗왕국의 이미지는 바로 에제키엘 에언자가 예언한 레바논의 삼목이었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근동 지역에서 가장 유명했던 레바논의 삼목을 꺽어와 시나이 산에 꽂고는 다윗왕국이 크게 일어나고, 레바논 삼목처럼 울창하게 되며, 그 때는 근방의 온갖 새들이 날아들 듯이,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찾아 들 것 이라고 말했었지요. 유다인들은 언젠가 이런 일들이 일어 날 것을 꿈꾸며, 다윗왕국의 표상으로서 울창한 레바논의 삼목을 상상했었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고, 미천한 겨자나무에도 새들이 깃든다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표상으로 겨자씨를 비유드심으로 해서,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느님 나라의 표상으로서 레바논의 훌륭한 삼목을 희롱하신거지요. 보잘것없고 미천한 겨자도 레바논의 삼목과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를 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큰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밀가로 서말은 100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 때, 사라는 서말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지요. 이 분량은 하느님의 출현을 경축하기에 알맞은 분량이라고 합니다. 비유이야기에서도 여자는 서말의 밀가루를 반죽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누룩없는 빵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누룩이 들어간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지요. 비유이야기에서 여자는 하느님 나라의 출현에 알맞는 분량의 빵을 반죽하지만,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은 누룩없음의 거룩함을 심하게 희롱하신 거지요. 이제는 부정한 누룩이 하느님 나라를 표상하는 거룩한 것이 되었답니다. 늘 자신을 죄인과 부정한 사람으로 여기고 기를 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서 잘난 사람들과, 보잘 것 없고 부정하다고 낙인 찍한 사람들이 있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예수님, 당신은 우리들에게 하느님 나라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부정하다고 낙인찍인 사람들도, 부자나 잘난 사람과 똑같은 기능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부자나 훌륭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 나라가 깃들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 저희들은 때로는 가난하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다음으로 미룰 때가 있답니다. 혹시 다음에 생활의 여유가 생기거나 어떤 능력을 지니게 될 때,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고 그 나라를 위해 일도 할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신께서는 우리들이 어떤 차지에 있던지 하느님 나라에 깃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울창한 휴양림에 새들이 깃들고, 잡초덤불에도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틀 듯 말입니다. 예수님, 하느님 나라는 저희들 처지와 상관없이 언제나 깃들 수 있는 나라입니다. 특히 저희들이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이 찍히더라해도, 그것은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판단할 뿐이지, 하느님 나라의 기준이 아닌 것을 깨닫고,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잃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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