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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 성월 묵상]
작성자박선환 쪽지 캡슐 작성일1999-11-04 조회수2,819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시간 강론(11월)

               <보화를 하늘 나라에 쌓아라>

           루가 12,13-21(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죽음이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임에는

틀림없지만,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부각되어 집니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을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한 몫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영국의 웨일즈라는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명예와 권력을 한 몸에 지니고, 훌륭한 저택과 넓은 정원을

갖고 있는 엄청난 부자 영주(領主)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오늘 밤,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죽게 될 것이다"

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 제일의

부자인 영주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 많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잃는다는 것이 더욱

두렵고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영주는 ’혹시 내게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를 불러

진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영주의 몸을 구석구석 세밀하게 진찰한

의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영주는

의사에게 밤새도록 침대 곁에서 자기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고, 자정이 넘어 새벽이 되었습니다. 영주는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

습니다. 어느 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서서히 먼동이 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영주는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도록 죽음이 찾아오지 않자, 영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습니다. 이 때 먼 곳에서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왔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였습니다.

영주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불쌍하고 눈먼, 거리에서 구걸하고 다니던 늙은

거지였습니다.

 

영주는 어젯밤 자신이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거지가 자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모아 놓고 죽은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영주는

하인들을 시켜, 거지가 살고 있던 움막을 샅샅이 뒤지도록 했지만,

그 움막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이불로 쓰던 한 다발의 지푸라기와

풀 베개뿐이었습니다. 거지 노인은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영주는 지난날 밤에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밤이 지나고 나니 오히려 가장 가난한 사람이

죽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을 풀 길이 없던 영주는

곁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의사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눈멀고 불쌍한 거지 노인은

더없이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좀도 슬지 않고 벌레가 먹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고 도둑 맞을 염려도 없는 보화를 하늘 나라에

가득 저축했던 것입니다. 그 참된 부자를 하느님께서 간밤에 불러

가신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감동한 영주는 그 후로 모든 재산을 털어 남을

돕는 데 쓰면서 욕심 없는 마음으로 일평생 열심히 기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그 거지 노인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의 이야기와도 일맥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많은 재산을 모으고 큰 창고를 지었던 사람에게

밤사이에 죽음이 닥치게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눈에 보이는

현세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헛된 삶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에 연연하는 것은 결코 영원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안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영원한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이 아니라 죽음과 더불어 찾아오는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 때 우리 존재의 차원은

어떠한 모양으로 변화될 것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는 아기가 세상에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하지만, 일단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엄마 뱃속에서의 존재 사실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듯이,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살아갈 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세상에서는 오늘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오늘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충실할 때라야 저 세상을

위한 준비가 갖춰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 역시도 오늘 우리들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볼 땐 삶의 단절이지만, 새로운 삶에로의 이행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기쁨과 설렘의 차원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 이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려움이 있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갖게 되는 미지의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의 나라이기에

우리들은 더 이상의 두려움도, 불안함도 간직한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들이 죽음이라고 바라보는 문제는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들 삶의

문제로 옮아가게 됩니다. 어떤 것이 잘 죽는 것이냐 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을 잘 사는 것이냐 하는 대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위령 성월을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성시간을 갖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영원한 차원을 위해서 오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들 한계의 삶을

내어놓고 기꺼이 맡겨 드리려는 겸손한 마음가짐은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손을 배우게 할 것이고, 세상에서의 가난과 부, 명예와

무명, 경제력이 있고 없는 것, 관계의 생성과 소멸 등을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서 추구하기보다는,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둔 대승적

자세로서 관망할 수 있는 너른 마음 자세를 갖추도록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재화를 하늘 나라에

쌓아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개방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들의 모든 것, 시간과 공간과 재산과 생명까지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 진솔하게 봉헌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11월, 위령 성월 한 달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선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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